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04.21.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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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04.21.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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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72회 작성일 Apr 22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4월 21일
본문: 마가복음 6:1-6
제목: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신약성경 히브리서 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과거를 회고하면서 우리도 약속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경고해 줍니다.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성경에 나오는 애굽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해 왔습니다. 여기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태어나 한평생 노예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도 죄악된 세상에서 태어나 죄의 종으로 일평생 노예생활을 하다가 결국 죄값으로 죽어야 할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의 노예가 되어 일평생 섬기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세상에서 마귀의 종노릇하다가 섬길 운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전격적으로 출애굽하게 하십니다. 홍해를 갈라 마른 땅같이 건너가게 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바로를 섬기는 노예가 아닙니다. 자유인이 되어 구원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세례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의미합니다. 과거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이제는 복음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신령한 복과 아울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임져 주신 것처럼 하나님 자녀된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에서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광야생활을 하면서 애굽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지난날 세상에서 살아간 방법대로 살려고 하다간 반드시 실패합니다. 광야에는 음식도 물도 고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애굽에서 살던 방식이 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시험하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과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히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그들이 왜 실패했는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원문을 직역하면 ‘그것이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으로 묶여지지 아니하였음이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믿음으로 화합되지 않으면, 혹은 믿음으로 우리 자신과 묶여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일은 기록한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경종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과정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의 길을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에 실패한 것처럼 우리도 약속하신 안식에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불러운 여러가지 기적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화합하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인해 예수님이 자라신 고향 땅에서 예수께서 아무 권능도 행치 않으시고, 저희들의 믿음의 결핍을 이상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께서는 열두 해 혈루병으로 고통 받던 여인을 고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후에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고향하면 모든 이에게 아련한 추억과 함께 왠지 그립고,  나를 다 이해해 주고 마냥 반겨줄 것처럼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고향을 향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이 가볍고 힘이 넘쳤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호기심이 가득한 가운데 모두 회당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르치실 기회를 얻으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일으키고, 북돋아주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하나님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신학이 다른 학문들과 구별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다른 학문은 그것이 인문학이든지 이공계이든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학문의 원리로 삼습니다. 물론 각 학문마다 주제가 다르고, 용어와 표현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지만 우리 인식과 지각을 바탕으로 하는 이성의 활동에 그 근거를 둡니다. 그런데 신학은 이성을 근거로 해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이 다루는 대상이 우리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초월자이신데 어떻게 우리의 인식과 지각,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그분을 탐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신은 유한한 존재이지 무한자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학은 무엇으로 가능할까요.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서 출발하고, 여기에 의존합니다. 즉 무한하시고 초월자이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계시’해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는 조심스레 신학을 전개해 갑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가장 기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시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적 세계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진리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과 지각, 그리고 양심에 호소하시며 설복하여 말씀이 믿어지도록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생활에 말씀을 듣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 사람들의 반응

그런데 예수께서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나온 그들에게 막상 말씀을 가르치실 때 저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절을 보면 그들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놀랐다’라는 헬라어 단어‘에크플레소(ekplesso)’는 문자적으로‘정신을 잃게 하다’는 뜻입니다. 너무 놀라서 한 대 얻어맞고 어리벙벙한 상태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이 상황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회의와 의심 가운데 스스로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로,예수의 가르침의 유래에 관하여 질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알던 바에 의하면 이것은 본인 자신의 실력과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가 근본을 알지 못하는 그 누구에게 한 수를 전수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아함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둘째로,예수의 지혜와 능력의 성격에 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라는 말은 예수께서 스스로 지혜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전수 받은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이 말은 바로 이전에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고치고,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을 가리킵니다. 현실적으로 나타난 이 지혜와 권능을 저들은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는 바에 따르면 예수는 이런 지혜와 권능을 행할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도대체 어찌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역시 의문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셋째로,예수의 신분에 관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직업을 들먹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들이‘목수’라는 예수의 전 직업을 운운히는 까닭은 그분의 가르침을 폄하하기 위한 것입니다. 목수로써 전문성이 있을지 몰라도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 요건은 구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여기서 예수님의 모친만 언급하고, 부친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고 있어요. 물론 요셉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유대인의 남성 중심의 가정 상황을 이해하면 여기서도 저들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가정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부친에 의하여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쉐마교육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 구약성경에 능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일찍 죽었기에 예수님은 성장과정에서 그런 교육이 결핍 되었을 것이라는 저들의 편견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언급함으로써 그 형제들과 누이들처럼 그도 평범한 한 필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모와 외적인 조건만을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잘못으로 부터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가진 우리의 직감이나 느낌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얘기합니다. 물론 그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 너무 앞서가면 결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할 수 없습니다. 가령 “저 사람이 요즈음 나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어”, “저 사람이 요즈음 나에 대해서 안 좋은 얘기를 하고 다니는 것이 같아”, “저 사람은 날 별로 안 좋아해” 이런 식으로 추측하고 판단한다면 그 사람을 대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대하니 상대방도 그걸 느낍니다.  뭔지 모르지만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기에 자연히 기분 나쁩니다. 그래서 자연히 얼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 하는데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거봐, 내 판단이 맞았지!” 이렇게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강화시켜 갑니다. 아무리 산뜻하게 출발했던 관계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되면 자연히 관계가 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임에서 리더로 쓰임을 받는 분들은 사람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사실에 입각하여 판단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저 사람 분명히…할거야”하는 식으로 자꾸 자기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우리 자신에게 있는 편견과 선입견에 대해서 냉철히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죄로 전인격에 오염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판단한다고 해도 어차피 자기중심적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과 선택에서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항상 갈등과 다툼이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상대방의 잘못과 허물만을 아주 크게 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 또한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 중에서도 교만이 가장 간교하여 스스로 자신을 기만하는 죄입니다. 남도 속이고, 자신도 스스로에게 속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좌와 우의 극단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주관적인 생각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진리 가운데 행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기적의 장면을 목격하고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목격한 사실부터 깊이 숙고해 보았어야 합니다. 과연 이 지혜의 말씀과 이적을 행하는 권능은 어디로 부터 온 것이냐? 하나님으로부터인가, 아니면 악한 영이나 사람으로 부터인가? 그분의 말씀과 행동에서 일치함이 있는지, 그분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계시 ‘구약성경’과 일치하는 것인지, 주도면밀하게 살펴보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고 논리적 결론이 내려지면, 그 다음 단계로 지혜로운 말씀과 권능을 행하는 이 분이 적어도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의 종임에 틀림없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자연스러운 논리적 추론이고, 합리적인 사고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눈에 증거를 보여주어도 그 진실을 외면하고 배척했습니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자세, 배우려는 자세가 결여 되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려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사실을 추론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으로 판단했습니다. 자신의 것이 전부가 아니라 지극히 부분적일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려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평소에 들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성경을 풀어주거나 이적을 보면 무조건 믿어버립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만이 진리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하여 지독한 아집과 고집, 그리고 교만에 빠집니다. 한 번 여기에 빠지면 완전히 세뇌 되어서 아무리 잘못이라고 지적해 주어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먼저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가는 곳마다 이런 편견과 교만 때문에 배척 받으신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실례가 요한복음 7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 후의 일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위협을 느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잡지 않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서 보니 그분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분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소리쳤습니다. “너희들도 미혹되었느냐? 그 사람은 이단이야!” 그 바리새인들의 말의 듣고 있던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행한 것과 그 말한 것을 가지고 냉철하게 판단합시다!” 무조건 사람을 거부하지 말고, 그 사람됨과 언행을 보고 판단하자는 말이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니고데모의 바른 소리에 나머지 바리새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슨 반박하는 말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하게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굴절된 지역감정을 이용합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7장 5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니고데모! 당신도 갈릴리 출신이오? 생각해 보시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해요! 혹시 당신이 갈릴리 출신이어서 갈릴리 사람인 예수를 변호하는 겁니까?’

성경에는 니고데모가 어디 출신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갈릴리 출신은 아닐 확률이 큽니다. 과연 니고데모가 갈릴리 출신이어서 예수님을 변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다만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따라 말한 것인데, 그 말에 대응할 말이 없으니까 “너도 갈릴리 출신이냐”고 윽박지르는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역적 편견을 고취시킴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역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실수하는 점이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그것을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일반화를 통한 자기변호’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다 늑대야! 여자는 다 여우야!”라는 식의 말들도 일반화의 전형적인 말들입니다. 가령 20대 한 여성이 사귀던 남성에게 버림 받아 상처를 입었을 때 ‘모든 남자는 다 늑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인생 20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만나 보았다고 서슴없이 그렇게 결론 짓습니까? 우리는 이런 식의 일반화의 편견에는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혼란스럽게 하고,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갈릴리 지역에서 선지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요나, 나훔, 호세야,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등 이스라엘 역사상 유명한 선지자들이 갈릴리 출신이었거나 거기를 무대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근거 없는 편견입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결국 이런 편견의 연장선에서 메시야를 거부해 버립니다. 편견은 이처럼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3. 예수님의 반응

이런 편견과 악의적 모함은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안겨 줍니다. 예수님도 고향사람들이라 더 많이 도와주고 싶으셨을 텐데, 그들이 마음 문을 닫고 자신을 배척했을 때 매우 힘드셨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셨습니까? 4절을 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선지자들도 고향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했던 사실들을 기억하시고 크게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소수의 병인들만 안수하여 고치시고 고향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많은 능력과 권세를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손해는 그들이 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평가절하하거나 배척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교만한 마음을 품고, 말씀을 영접치 않을 때 은혜의 역사, 권능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의 권능을 덧입기 위해서는 모든 교만과 선입견을 벗어 버리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나아만장군은 큰 용사였지만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포로로 잡혀온 히브리 계집종 하나가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면 문둥병이 낫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나아만장군은 많은 선물을 싸들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문 조차 열어보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그러자 나아만 장군은 자존심이 크게 상해서 노발대발하였습니다. “아니! 지가 뭔데 감히 이 아람의 군대장관을 오라 가라 하는 거야? 버선발로 뛰어와서 나를 영접하러 나왔어도 부족할 판인데. 그리고 아람에는 강이 없어서 내가 여기까지 왔더란 말이냐, 아람의 다메섹 강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물보다 더 낫지 아니하냐? 우리 아람의 강들은 1급수야, 1급수. 자 돌아가자.” 이때 부하가 나아만 장군을 진정시키며 말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 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밑져봐야 본전인데 한번 순종해 보시죠.” 이때 나아만 장군이 생각을 고쳐먹고, 겸손하게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지위, 신분, 권세의 교만을 내려놓고, 말씀을 영접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는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동화를 들려주면 그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서 자신이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됩니다. 동화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흡수합니다. 어른들은 더 이상 동화를 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약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물이 들어서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합니다, 돈으로 차별합니다. 외모로 차별합니다. 직업으로 사람을 차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복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불신을 버리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복음을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입견과 교만과 인간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영접하여 순종하므로 우리의 내면 가운데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이루어 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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