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다 (04.14.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에바다 (04.14.2024)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82회 작성일 Apr 15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4월 14일
본문: 마가복음 7:31-37
제목: 에바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세계에서 가장 큰 열차 사고는 1994년 1월 3일 스페인의 레온에 있는 엘토로 터널에서 생긴 사고일 것입니다. 500명 이상이 죽은 사고였습니다. 이 열차는 기관차를 앞과 뒤에 달고 달리는 긴 여객열차였습니다. 사고가 난 이날 열차가 엘토로 터널에 들어갔을 때 앞쪽 기관차가 갑자기 섰습니다. 앞 기관차가 섰을 때 뒤 기관차는 열차를 터널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후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앞 기관차가 고장 난 것을 바로 잡고서 열차를 앞으로 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앞과 뒤의 두 기관차끼리 의사소통이 없었습니다. 앞뒤 양 쪽 기관차가 열차를 끌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양쪽은 더욱 속력을 냈습니다. 이렇게 터널 속에서 두 기관차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동안 수백명 승객들은 기관차에서 뿜어 내는 일산화탄소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고입니다. 만약 앞뒤 기관차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장비가 되어 있었다면 이런 비극적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의사 표현이 너무 달라 서로 소통이 안 되는 짐승으로 개와 고양이를 꼽습니다. 즉 강아지는 반가움의 표현으로 꼬리를 세우고 흔듭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꼬리를 세우고 흔드는 것을 위협이요, 공격의 표시라고 봅니다. 그러니 서로의 의사가 소통이 안 되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열린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의사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지구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과도 직접 화상으로 얼굴을 마주보며 통화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독점되었던 정보들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하면 원하는 정보들이 차고 넘치도록 제공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통을 강조하고 열린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한 구석에서는 마음을 열지 못하여 이웃과 소통하지 못하고, 외롭고 답답한 인생을 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자신의 소통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는 소통이 잘 되십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교우들과 서로 소통이 잘 되십니까?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소통이 잘 되십니까? 직장에서 동료들과 상관들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자폐증의 증상들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세계에 각혀 있어서 이웃과 거의 소통이 없습니다. 말을 걸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에 감정의 표현이 없습니다. 자기가 관심을 갖는 일 외에는 외부 세계에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신체적 자폐증은 아니더라도 영적인 자폐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에게 한 번도 마음을 열어 보지 못한 사람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소통하지 못하고, 외로움과 답답함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더 답답한 것은 이런 사람의 외로움과 답답함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예수께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옵니다. 귀먹어 듣지 못한다는 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말을 못한다는 것도 단절을 의미합니다. 소통불능이자 관계 단절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세상을 살아왔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은 그가 신체적 청각뿐 아니라 영적인 청각이 고장이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그의 혀가 무엇인가에 묶인바 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인생은 하늘에 계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해 닫혀 있습니다. 소위 영적 자폐증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외부 세계와의 문을 닫고, 자기 안의 세계 안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불통의 벽에 둘러싸여 닫힌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가 오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닫힌 인생이 열리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런데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방식에 주목해 보십시오. 치유하시는 방식이 아주 특이합니다. 저자 마가는 이 장면을 아주 자세히 기술해 줍니다.

1.  예수님은 친히 그를 만져 주셨습니다.

33절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예수께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사람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일대일의 관계에서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명성을 얻고자 하였더라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병자를 치유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는 고통 당하고 있는 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던 이 사람은 소통불능 상태에서 아마도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고, 마음에 상처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환자가 경계심을 풀고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시며 그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십니다. 그래서 환자 스스로 자신의 아픈 모습을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도록 배려하십니다. 예수님의 섬세한 배려입니다. 마치 세상에 그 사람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소중히 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온 우주에 나 홀로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는 것처럼 부어주셨습니다. 처음 은혜 받을 때 나만을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과 같아서 흥분해서 간증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친히 만져 주십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씀하지 않으시고 손으로 직접 만져 주십니다. 이것은 친히 고통의 자리를 어루만져주시면서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환자가 느낄 수 있도록 만져 주신 것입니다. 불신과 절망으로 얼어붙은 그에게 사랑의 접촉을 시도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침을 뱉어 환자의 혀에 바르셨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침은 민간요법으로 치료제로 쓰였습니다. 저도 어릴 적에 모기나 벌레에 물렸을 때 침을 발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옛날 할머니가 어린 손주에게 먼저 음식을 입속에 넣어 침을 섞으며 부드럽게 한 후에 먹이는 광경이 기억합니다. 이렇게 침이란 깊은 사랑으로 끈끈히 맺어진 관계에서만 나눌 수 있는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아파하는 자에게 당신 속의 것을  친히 내어 주시면서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십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더 아픕니다. 대신 병을 앓고 싶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아파해주신다면, 그래서 나의 아픔이 주님의 아픔으로 옮겨진다면, 전이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거룩한 기대감이 솟구치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단순히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 귀 먹고 어눌한 자를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굳어져 버린 혀를 사랑으로 풀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써 환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하십니다.

2. 두 번째로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막힌 귀와 어눌한 혀를 친히 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은 흙을 빚어 친히 사람을 만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여 치료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십니다. 자신이 직접 치유하실 수 있음에도 그에게 치료의 능력,기도의 응답이 하늘로부터 옴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하는데 “위를 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인간 만이 위를 향해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름다운 창조주의 계획입니까? 야고보서 1장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놀라운 능력과 도움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있지만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하늘을 쳐다볼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땅에 것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합니다.(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의 중보자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므로 위엣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시 121:2).

3.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왜 예수님은 그냥 자신있게 고치시지 않고 탄식하셨을까요? 원문에서 ‘탄식’의 본래 의미는 “불쌍한 표정으로 신음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음에 가까운 고통의 소리입니다.이렇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분명한 동기가 있습니다.그것은 사랑입니다.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쌍히 여김’,영어로는 ‘compassionate’ 입니다.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나 사단의 궤계로 인간이 삶의 권리를 박탈 당했을 때 그 비참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파하는 상태”입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식은 고통 받고 있는 한 인간의 삶에 주님이 직접 동참하면서 터져 나오는 긍휼과 자비의 신음입니다. 이 탄식의 종착역이 어디입니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가 아닙니까? 죄로 인해 병든 인간이 치유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희생하신 사건,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까? 

우리도 딱한 처지의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보십시오.육체와 정신에 고통 받는 이들을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볼 때,우리도 주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현대 사회에서 기적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사랑이 식어 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 시대에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 무슨 뜻입니까? ‘열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 졌더라”

드디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거기서 끝났을까요? 아니지요. 그는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귀가 열리고 다음에 입이 열립니다. 귀먹은 벙어리가 말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치유는 먼저 닫힌 귀를 열어주고, 그 다음에 굳어버린 혀를 풀어주는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듣기와 말하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이지만.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잘 듣지 못하면 제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말을 잘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보더라도 말은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습니다. 복음을 들어 그 마음에 믿음이 발생할 때 입으로 시인하게 됩니다. 만약 복음을 듣지 못한다면 믿음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고, 입술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롬 10:14-15)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중세 때는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대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귀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 모두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로 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당시 라틴어를 공부한 사람들은 사제들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멋지게 가운 입고 앞에 나와서 엄숙하고 거룩하게 말씀을 줄줄 읽고 엄숙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전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멋져 보였겠지만, 사실 그들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나누어 주어 읽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책 뿐만 아니라 오디오와 영상을 통해서 쉽게 하나님 말씀을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설교를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오직 세상적인 것들을 향하도록 미혹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과 스포츠, 자극적인 드라마와 영화 등등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는 먼저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게 자기 말만 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말을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해서 내 요구사항을 다 말하고 나면 그것으로 기도가 끝입니다. 기도가 잘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려면 먼저 귀 부터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오기는 했어도 귀가 안 들려 들을 수 없었고, 혀가 굳어져 말할 수 없었던 이 사람의 모든 것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귀도 열리고, 입도 열리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게 하시고, 혀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한 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아침에 이 능력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저자 미가는 오늘 본문에서 단순히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신 기적 사건을 전하고자 기술한 것이 아닙니다.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 메시야의 날이 이르렀을 때 일어날 현상이 지금 이방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이사야 35:5-6절을 보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지금 이방 땅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심으로써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여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또 받아드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 땅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 땅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되십니다. 이방인 우리도 이에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귀를 열어 주셔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혀를 열어 주셔서 주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귀먹고 혀가 어눌하여 닫힌 인생을 살던 사람을 향해 ‘에바다’말씀하시던 예수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에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닫힌 귀를 열라! 마음의 문을 열라!

우리가 예수를 믿어 성령이 임하면 닫힌 심령, 닫힌 마음, 닫힌 지성, 닫힌 감성, 이 모든 것이 활짝 열립니다. 그래서 자유함과 기쁨과 평강이 임합니다. 풍성한 천국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후 6:8)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오늘 이 아침에 모든 장애물들, 상처와 아픔, 죄와 죄책감, 그리고 비참으로 인해 닫혔된 인생이 성령의 자유케 하심으로 활짝 열리며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