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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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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91회 작성일 Apr 29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4월 28일
본문: 마가복음 6:14-29
제목: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떤 옷을 입을 지를 선택하였습니다. 이렇게 크고 작은 일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친구를 선택하고, 학교를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합니다. 만날 사람을 선택하고,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선택합니다. 육체적으로 병들면 의사를 선택하고, 영적인 도움이 필요하면 영적 인도자를 선택합니다. 읽어야 할 책을 선택하고, 시청할 드라마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선택하고, 영원히 거할 처소를 선택합니다. 우리가 신뢰해야 할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선택은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선택한다고 해서 당장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토머스 칼라일은 “선택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영원하다”고 말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씨를 뿌려야 할 때 뿌리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그 결과는 추수 때가 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을 잘 하는 지혜가 복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선택이 싫어서 모호하게 뒤로 미루거나 회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삶에서 회피하거나 뒤로 물러서서는 안될,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신 30: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 사이의 선택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 생명과 복을 선택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어느 선택이 좋을지에 대해 친절하게 말씀합니다. 올바른 선택이 가져오는 축복을 말씀하시고, 만일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할 때 어떤 결과가 뒤따르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십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도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천국 문 앞에서 배회한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천국에 들어갈 기회가 왔으나, 결코 그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끝내 미끄러져 떨어져 나갔던 사람입니다. 불의한 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주저하다가 끝내 그 기회를 영영 놓쳐 버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복음은 항상 결단을 요구합니다.

광야에 약대 털옷을 입고 등장한 세례 요한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때 그의 멧세지는 불을 토하는 듯한, 회개를 촉구하는 멧세지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분명한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명확히 태도를 취하도록 요구하는 그의 말씀에 사람들은 압도 당하였습니다. 그는 미사여구로 사람들을 끌려고 하지도 아니하였고, 웅변적인 말솜씨로 청중들의 호감을 사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전파한 멧세지는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였기에 이에 사람들이 외치길 “우리가 어떻게 하리이까?”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멧세지를 듣고 혼동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선택해야할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는 본처와 이혼하고, 배다른 동생 빌립의 아내를 취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그 일이 “옳지 않다”하고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써 헤롯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서 회개하여 부정한 삶에서 돌이킬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계속해서 쾌락을 택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세례 요한과 똑같은 멧세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넓은 길과 좁은 길, 넓은 문과 좁은 문, 모래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하나님과 맘몬, 오직 두 가지 선택이 우리 앞에 있을 뿐이고,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을 촉구하셨습니다.  인생의 전부를 걸고 오직 주님을 믿고 따를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만났던 사람들은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둘 중 하나 양자택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복음을 전파할 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며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도다”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양심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태도를 바꾸었고, 하루에 삼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결심하여 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지난 간 곳마다 두 그룹으로 확연히 나뉘어졌습니다. 한편은 복음을 듣고서 주께로 돌아오고, 또 다른 한편은 오히려 분을 내어 이를 갈며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마치 빛과 어둠이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복음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은 자들로 명확히 구분 지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요즘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교육을 잘 받아 교양 있는 사람들이므로 너무 무식하게 전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적당히 부드럽게 말해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지루하지 않게 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도 집어넣고, 스트레스가 많은 시대니까 잘 위로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복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결단과 결심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어떤 결단을 내렸습니까? 이 복음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켰습니까? 복음이 여러분에게 전인격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그로 말미암아 결단에 이르고, 행동에 옮기도록 여러분을 움직여 놓았습니까? 복음은 항상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2. 복음을 듣고 결단하는 것을 막는 장애가 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양심을 압도하는 진리의 힘을 느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두려움 없이 담대히 말씀을 선포하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서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하고,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하면서도 달게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례 요한의 말에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의 목을 베어 버린 살인자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거의 천국 문에 까지 갔다가 결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로 미끄러져서 영벌로 가버린 그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헤롯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서 결단하려할 때 항상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헤롯의 어떤 점들이 생명을 대신 사망, 복 대신 저주의 길을 택하게 만들었는지를 한 번 숙고하여 보고, 우리 모두 이를 반면교사로 삼기 원합니다.

1) 경박한 인물-깊이 사색이 없음

헤롯은 한 번도 사건과 사물을 올바르게 꿰뚫어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단지 어떤 느낌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는 인물이라고 보여 집니다.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의해서, 또는 주어진 분위기에 따라서 그의 마음은 좌우되었습니다. 요한의 말을 듣는 동안에는 헤로디아를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반대로 헤로디아의 말을 듣는 동안에는 조금전 요한의 말씀에 거의 압도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깊이가 없는, 아주 피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에 대해, 역사에 대해, 종말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의 본질까지 한 번도 심사숙고해 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끝나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정당하고 올바른 입장을 끝까지 일관되게 고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정당한 논리의 결론으로 내가 어떻게 결단해야 할 것인지, 그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이성적이거나 비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온전한 정신으로 듣고 논리적 추론을 하게 된다면 정당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택할 것인가, 멸망을 택할 것인가. 복을 택할 것인가, 저주를 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결론에 따라 우리가 올바른 선택과 결단을 내리면 됩니다. 헤롯왕도 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의로운 사람이며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나의 삶은 그와 영 딴판이지. 옳지 못한 것은 내 자신이다. 왜냐면 요한이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으니까. 분명히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길은 내가 따라가야 할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그렇다면 헤로디아와 헤어지고, 이 불의한 삶을 청산해야만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이지.” 헤롯은 이렇게 논리적인 결론을 내렸어야 했습니다.

우리 자신도 정직히 문제를 대면한다면 이런 논리적 귀결에 인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기에 하나님, 영원한 재판장께서 계신다. 여기에 나, 곧 죄인이 서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은 분명하고, 의로운 삶을 명백히 제시해 놓고 있다. 그리고 장차 나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분 앞에서 죄에 대한 책임이 있고, 그 죄책 때문에 오직 정죄와 지옥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율법과 양심이 확증한다. 그런데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죄 사함과 새생명으로 초대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헌신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 길이 나의 유일한 출구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얼마나 당연한 귀결입니까?

그런데 헤롯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깊이 숙고하여 결단하는 것을 회피합니다. 그저 양심가책을 받고 잠시 고민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깊이가 없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경박합니다.

2) 죄의 기호-죄를 끊어 버리는 결단이 없음

헤롯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열쇠는 그가 죄를 사랑하였다는 점입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을 때 마음에 번민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사악한 악습이나 나쁜 습관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릇된 일들을 바로 잡기 위하여 정말이지 이런 저런 일들을 행하였을지 모릅니다. 외부 행사에 바빴고, 백성들을 안돈시키기 위해 법을 개정하고, 공적을 쌓기 위해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죄수들을 풀어주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결단해야할 그 부도덕한 생활과 헤로디아와의 불법적 불륜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지 않습니까? 헤롯처럼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우회하여 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 저런 일로 바쁩니다.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만나서 의논을 하고, 일을 벌려 열중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꼭 해야 할 일, 그 결정만은 차일피일 뒤로 미룹니다. 바로 그 일이 생명의 조건이요 복의 조건인데도 정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원하시는 것은 더 많은 봉사, 더 많은 구제나 선행이 아닙니다. 우리의 온전한 복종을 원하십니다.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원하시고, 전적으로 의지적 결단을 원하십니다.

3) 사람들의 평판

헤롯이 왜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까요? 26절에서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인하여”

잔치 날 손님들 앞에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들어와 춤을 추어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헤롯은 그녀에게 무엇을 구하든지 주겠다고 약속하자 그녀는 헤로디아에게 묻고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합니다. 헤롯이 이 요구에 잠시 망설였지만 거기 모인 무리를 인하여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헤롯의 또 다른 중대한 문제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을 거절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체면과 위신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헤롯의 심중에는 그 모인 무리들이 세례 요한보다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그들을 경멸했습니다. 그 반면에 세례 요한을 두려워했고,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인기와 쾌락,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환호를 더 사랑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자기 양심을 눌러버렸습니다. 악을 위하여 선을 희생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하늘의 보화들과 영원한 축복들을 거절하였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전체가 비웃고 조롱한다고 하여도 영생을 취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이지 않겠습니까? 왁자지껄하며 떠들어 대는 그 사람들에 대한 시선 때문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야 말로 미치광이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위신과 체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고 할까봐 결단을 내리지 못하며 주저합니다. 

3. 결단 없는 복음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설교를 달게 들었고, 개인적으로 좋아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분명히 무엇인가 결정해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고, 그리고 결단하지 않음으로써 세례 요한의 거룩한 영향력이 무가치하고 무효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결단 없는 복음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성경에 대한 가르침이 많고, 원하기만 한다면 신앙 생활하는데 필요한 자료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많은 책들과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서 설교를 들을 수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결단까지 이끌고 가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얼마나 말씀을 듣고, 그것 때문에 감동을 받았고, 거기에 동의하고 동감했느냐가 진정한 신앙의 시금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이 나를 결단으로 이끌고 갔고, 그래서 이에 대해서 나는 명백한 태도를 취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여기까지 이끌지 못했다면 그 모든 노력이 해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내게 전혀 쓸모없고 무기력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20절 “헤롯도 요한을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였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헤롯이 왕의 권한으로 그를 싹 문질러 없애버리거나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해씁니다. 그뿐 아니라 감옥에 까지 내려가 그의 말을 듣고 크게 번민하였습니다. 입에는 쓰지만 달게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 결심에 이르지 못하였고, 이로써 영원히 천국 문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한번 복음이 옳고 진정한 것이라고 느꼈음에도 거기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기까지 결코 그 심령에는 평안이나 안식이 없을 것입니다. 가엾은 헤롯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을 목 베고 난 후 그의 생애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이었는가? 깨어 있을 때나 잠자고 있을 때나 목 베임을 당한 요한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의 무죄한 피가 호소하는 것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의 목을 침으로써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침묵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느 곳을 가든지 세례 요한의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적과 기사의 권능을 행하였다는 소문을 듣고서 세례 요한이 다시 부활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16절에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요한의 망령은 헤롯의 생애를 줄곧 붙어 다니며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리는 거절할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진리를 멸할 수 없습니다.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살아 있어서 영원히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소리를 듣고도 결정하지 못하여 배회하는 인생에게는 결코 안식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우리 삶의 결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평생 내릴 결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입니다. 왜냐하면 이로써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건, 또는 얼마나 많은 권력을 쥐고 있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선택하는 것보다 더 큰 선택은 없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로 부터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온 천하 만물을 통치하시며 잠시 잠깐 후면 영광의 주로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받아 드리지 않는다면 장차 그 분은 엄위로운 재판장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어린양의 분노”만큼 두렵고 가공할 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계 6:15-17)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오늘날에도 천국 문 앞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거의 신자일 뻔하였지만 결코 신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헤롯의 모습이 아닙니까? 한 때 교회 안으로 들어왔지만, 함께 예배 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였지만, 함께 교제하며 먹고 마셨지만 결코 천국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도 복음을 들을 때마다 그들은 감동되고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초청에 마땅히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거의 그런 단계에 까지 이릅니다. 그럼에도 결코 그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언저리에서 배회하지만 결코 그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헤롯처럼 될 것입니다. 영원한 자책과 절망, 곤고와 비참, 멈출 수 없는 영원한 고통, 이것들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거절한 이들에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이 비극적인 운명으로 부터 구원하시고, 또 구원하실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놀라운 하나님의 초청에 우리 삶을 맡겨서 새 출발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충만해 져서 기쁨과 평강이 흘러 넘칠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충만히 누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펼쳐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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