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07.12.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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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98회 작성일 Jul 13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7월 12일
본문: 에베소서 6:10-13
제목: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새벽 두 시입니다. 온 집안은 적막합니다. 그런데 혼자 거실 불을 켜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일 병원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입니다. 잠은 오지 않고, 휴대폰으로 같은 병명을 몇 번이고 검색합니다. “혹시 큰 병이면 어떡하지?" "수술을 해야 하면?" "남겨진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하지?" 그 순간, 그 사람에게는 내일 마주할 질병이 인생 가장 거대한 싸움처럼 보입니다.
또 어떤 분은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벌써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직장 상사가 툭 던진 말 한마디가 화살처럼 박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엇나가는 자녀 때문에 눈물로 밤잠을 설치고, 누군가는 텅 빈 은행 통장과 노후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힙니다.
여러분은 요즘 무엇 때문에 가장 흔들리고 계십니까?
우리는 대부분 내 눈앞에 보이는 이 현실의 문제들과 피 흘리며 싸운다고 생각합니다. 건강과 싸우고, 경제와 싸우고, 사람과 싸운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처방전을 제시합니다. "조금 쉬십시오." "스트레스를 관리하십시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 안에서 이런 도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그것이 너의 진짜 싸움이냐?"
오늘 말씀은 우리 삶의 표면을 넘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영혼을 무너뜨리려는 죄의 세력,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악한 권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눈을 예수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합니다. 걱정으로, 염려로, 비교로, 두려움으로 우리를 뒤흔듭니다. 시선이 바뀌면 우리 삶도 결국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선포하면서, 원수 대적의 강함이나 사탄의 두려움을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지 않습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이렇게 선언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엡 6:10)
참 놀라운 순서입니다. 어둠을 말하기 전에 먼저 빛을 보여 줍니다. 전쟁을 말하기 전에 먼저 승리하신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원수에게 머무는 순간 우리는 두려워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께 머무는 순간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이미 승리하신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앞서 싸우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의 비밀을 세 가지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한가?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낸 에베소는 당대 로마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항구도시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부와 성공, 눈에 보이는 번영을 좇아 살아가던 곳이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 불리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웅장하게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신전 앞에 제물을 바치며 자신의 삶의 안전을 구했습니다. 경제적 풍요를 구했고, 불확실한 미래를 맡겼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신전과 신상이 그들의 가장 든든한 요새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에베소 사람들의 그 거대한 신전이, 혹시 오늘 우리의 '은행 통장'은 아닙니까? 그들이 풍요를 구하던 우상이 오늘 우리의 '건강'은 아닙니까? 그들이 미래를 맡기던 신상이 오늘 우리의 '자녀의 성공'은 아닙니까?
바울은 그 거대하고 화려한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왜입니까? 바울은 12절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의 본질을 분명하게 폭로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은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이나 인간관계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과 환경 뒤에서 역사하는, 더 깊은 영적 현실을 꿰뚫어 보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말씀을 읽고 은혜로 가득 차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출근길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누군가 무례하게 끼어듭니다. 그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직장에서는 내 노력과 진심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온종일 영혼이 탈탈 털립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이 무심코 던진 작은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입고 돌아섭니다. 그리고 하루가 끝날 때쯤 가만히 돌아보면, 아침의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마음에 걱정과 원망만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개를 저으며 말합니다. "아니다. 너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삶을 한 번에 무너뜨리기보다, 아주 조금씩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기도는 내일로 미루게 하고, 말씀은 바쁘다는 이유로 덮게 합니다. 오늘 내게 주신 감사 대신 남과의 비교를 교묘하게 심어 줍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평온해 보이는 일상조차 사실은 거대한 전선(戰線)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암 진단을 받는 자리도 영적 전쟁입니다. 자녀를 품에 안고 눈물 흘리는 자리도 영적 전쟁입니다. 부부가 서로 차가운 말을 주고받는 자리도 전쟁이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마음이 지쳐버린 그 자리도 실상은 모두 영적 전쟁의 한복판입니다. 그리고 내 얄팍한 결심이나 의지만으로는 이 집요한 죄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공급하시는 하늘의 무기, 곧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2.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흔히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같은 여섯 가지 영적 장비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 믿음의 방패가 왜 이렇게 작을까?', '내가 진리의 허리띠를 덜 졸라 매서 그런가?'라며 또다시 나의 종교적 열심을 다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전신갑주의 본질이 있습니다.
전신갑주의 여섯 조각은 결국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완벽한 옷이 되어 우리를 덮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9롬 13:14)고 선포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 것은 나의 더 위대한 영성이나 뜨거운 열심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인격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갑옷은 군인이 스스로 대장간에서 철을 녹여 제조하여 입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위해 왕이 최고의 재질로 완벽하게 준비합니다. 왕이 군인에게 하사하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영적 무장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공급하시는 완벽한 은혜입니다. 10절 말씀처럼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건하여지고’라는 동사 역시 헬라어 원문에서 수동태입니다. 내 안에서 의지력을 억지로 쥐어짜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을 그대로 덧입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대함입니다. 세상은 늘 “더 노력하라, 네 잠재력을 더 끌어내라”고 다그치지만, 복음은 “내가 다 이루었다. 네 힘으로 안 되니 나의 완벽한 승리 안에 들어와 숨어라.”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오늘도 내 삶의 주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염려와 스마트폰을 먼저 보지 않습니다. 나를 완전히 감싸고 계시는 예수님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그분의 진리에 맡기고, 내 밀려오는 두려움을 그분께 가져갑니다. 매일 반복되는 죄책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자랑도, 내 깊은 상처도, 내 불확실한 미래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두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는 삶입니다.
고대 군인들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무겁고 불편하더라도 갑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적의 기습이 언제, 어느 순간에 들이닥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 삶이 아무리 평안하고 괜찮아 보여도 유혹과 낙심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일에만 경건의 갑옷을 입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치열한 월요일에도, 고단한 화요일에도, 외로운 병실에서도, 땀 흘리는 직장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안전한 옷을 항상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3. 우리는 어떻게 싸우는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는, 이제 실제 일상의 전선에서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본문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면 군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무언가 대단한 적을 정복하는 승전보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뜻밖의 명령을 내립니다. "공격하라" 거나 "파괴하라" 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명령은 단 하나, "서라"입니다. 왜 영적 전쟁의 핵심이 '서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미 우리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승리를 얻어내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승리 위에서 그 자리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죄와 사망, 그리고 어둠의 세력에 대한 예수님의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싸움은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불안한 전쟁이 아닙니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전쟁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승리를 개척하는 군사가 아닙니다. 왕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자리를 믿음으로 끝까지 지켜 서 있는 군사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위로입니까?
여기서 많은 성도들이 밀려오는 자괴감에 낙심합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 자주 넘어집니다. 기도하다가도 낙심하고, 결심했다가도 또 무너집니다. 저는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특징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질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목자와 양의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미련한 양 한 마리가 길을 잃고 가시덤불에 걸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습니다. 힘이 다 빠져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양이 스스로 애를 쓰고 다리에 힘을 주어 목자에게 돌아옵니까? 아닙니다. 목자가 거친 산을 넘고 가시투성이의 들판을 헤치며 나아옵니다. 그 지친 양을 발견하고 번쩍 들어 자기 어깨에 맵니다. 양은 자기 다리의 힘이 세서가 아닙니다.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단단히 붙들고 가기 때문에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대적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그 안전한 목자의 어깨 위에서 흔들어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만든 다음,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절망의 참소를 퍼붓습니다. "너 같은 사람이 무슨 성도냐. 하나님이 너 같은 자를 아직도 사랑하시겠냐? 이제 끝이다."라며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예배를 뒤로 미루게 만들고, 말씀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우리에게 외칩니다. 넘어졌습니까? 다시 일어나십시오! 실패했습니까?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울고 있습니까? 다시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가십시오! 목자 되신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 양을 포기하거나 손에서 놓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낙심이 밀려올 때 기도의 자리를 지켜내고, 말씀 앞에 다시 서며,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기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서 있는 삶'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로 얼룩지고 매일 넘어지는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이 거룩하고 완벽한 전신갑주를 선물로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맨몸으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 오늘 우리에게 "전신갑주를 취하라, 갑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위해 싸우신 대장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갑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분의 옷을 무참히 벗겼습니다. 머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채찍으로 그분의 온 등과 몸을 찢었습니다. 사람들은 침을 뱉고 조롱하며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갑옷도 없이, 홀로, 맨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아내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영 죽을 우리에게 당신의 완벽한 의의 옷을 거저 입혀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입은 전신갑주는 우리의 도덕적 공로나 경건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값을 치르고 우리에게 입혀 주신 은혜의 옷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실패하고 흔들릴지라도 다시 소망을 품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다시 걱정이 먼저 밀려올 수도 있고, 삶의 자리로 돌아가면 또 죄를 짓고 낙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갑옷을 빈틈없이 잘 챙겨 입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완전한 갑옷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복잡하고 위험한 시장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금방 한눈을 팝니다. 장난감을 보느라 손에 힘을 스르륵 풀어버리기도 하고, 발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아이가 아버지를 잡은 손의 힘이 세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 가녀린 아이의 손을 결코 놓지 않고 꽉 쥐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안전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은 언젠가 힘이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은 결코 힘이 빠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차갑게 식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결코 식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다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인생의 고단한 전선 앞에서 이 한 가지 진리를 평생토록 가슴에 새기십시오. 성도의 안전은 자신의 손에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 믿음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전신갑주를 입고, 세상 가운데 담대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날짜: 2026년 7월 12일
본문: 에베소서 6:10-13
제목: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새벽 두 시입니다. 온 집안은 적막합니다. 그런데 혼자 거실 불을 켜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일 병원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입니다. 잠은 오지 않고, 휴대폰으로 같은 병명을 몇 번이고 검색합니다. “혹시 큰 병이면 어떡하지?" "수술을 해야 하면?" "남겨진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하지?" 그 순간, 그 사람에게는 내일 마주할 질병이 인생 가장 거대한 싸움처럼 보입니다.
또 어떤 분은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벌써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직장 상사가 툭 던진 말 한마디가 화살처럼 박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엇나가는 자녀 때문에 눈물로 밤잠을 설치고, 누군가는 텅 빈 은행 통장과 노후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힙니다.
여러분은 요즘 무엇 때문에 가장 흔들리고 계십니까?
우리는 대부분 내 눈앞에 보이는 이 현실의 문제들과 피 흘리며 싸운다고 생각합니다. 건강과 싸우고, 경제와 싸우고, 사람과 싸운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처방전을 제시합니다. "조금 쉬십시오." "스트레스를 관리하십시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 안에서 이런 도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그것이 너의 진짜 싸움이냐?"
오늘 말씀은 우리 삶의 표면을 넘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영혼을 무너뜨리려는 죄의 세력,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악한 권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눈을 예수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합니다. 걱정으로, 염려로, 비교로, 두려움으로 우리를 뒤흔듭니다. 시선이 바뀌면 우리 삶도 결국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선포하면서, 원수 대적의 강함이나 사탄의 두려움을 먼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지 않습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이렇게 선언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엡 6:10)
참 놀라운 순서입니다. 어둠을 말하기 전에 먼저 빛을 보여 줍니다. 전쟁을 말하기 전에 먼저 승리하신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원수에게 머무는 순간 우리는 두려워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께 머무는 순간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이미 승리하신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앞서 싸우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의 비밀을 세 가지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한가?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낸 에베소는 당대 로마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항구도시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부와 성공, 눈에 보이는 번영을 좇아 살아가던 곳이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 불리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웅장하게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신전 앞에 제물을 바치며 자신의 삶의 안전을 구했습니다. 경제적 풍요를 구했고, 불확실한 미래를 맡겼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한 신전과 신상이 그들의 가장 든든한 요새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에베소 사람들의 그 거대한 신전이, 혹시 오늘 우리의 '은행 통장'은 아닙니까? 그들이 풍요를 구하던 우상이 오늘 우리의 '건강'은 아닙니까? 그들이 미래를 맡기던 신상이 오늘 우리의 '자녀의 성공'은 아닙니까?
바울은 그 거대하고 화려한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왜입니까? 바울은 12절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의 본질을 분명하게 폭로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은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이나 인간관계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과 환경 뒤에서 역사하는, 더 깊은 영적 현실을 꿰뚫어 보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말씀을 읽고 은혜로 가득 차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출근길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누군가 무례하게 끼어듭니다. 그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직장에서는 내 노력과 진심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온종일 영혼이 탈탈 털립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이 무심코 던진 작은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입고 돌아섭니다. 그리고 하루가 끝날 때쯤 가만히 돌아보면, 아침의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마음에 걱정과 원망만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개를 저으며 말합니다. "아니다. 너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삶을 한 번에 무너뜨리기보다, 아주 조금씩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기도는 내일로 미루게 하고, 말씀은 바쁘다는 이유로 덮게 합니다. 오늘 내게 주신 감사 대신 남과의 비교를 교묘하게 심어 줍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평온해 보이는 일상조차 사실은 거대한 전선(戰線)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암 진단을 받는 자리도 영적 전쟁입니다. 자녀를 품에 안고 눈물 흘리는 자리도 영적 전쟁입니다. 부부가 서로 차가운 말을 주고받는 자리도 전쟁이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가 마음이 지쳐버린 그 자리도 실상은 모두 영적 전쟁의 한복판입니다. 그리고 내 얄팍한 결심이나 의지만으로는 이 집요한 죄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공급하시는 하늘의 무기, 곧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2.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흔히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같은 여섯 가지 영적 장비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 믿음의 방패가 왜 이렇게 작을까?', '내가 진리의 허리띠를 덜 졸라 매서 그런가?'라며 또다시 나의 종교적 열심을 다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전신갑주의 본질이 있습니다.
전신갑주의 여섯 조각은 결국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완벽한 옷이 되어 우리를 덮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9롬 13:14)고 선포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 것은 나의 더 위대한 영성이나 뜨거운 열심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인격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갑옷은 군인이 스스로 대장간에서 철을 녹여 제조하여 입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위해 왕이 최고의 재질로 완벽하게 준비합니다. 왕이 군인에게 하사하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영적 무장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공급하시는 완벽한 은혜입니다. 10절 말씀처럼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건하여지고’라는 동사 역시 헬라어 원문에서 수동태입니다. 내 안에서 의지력을 억지로 쥐어짜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을 그대로 덧입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대함입니다. 세상은 늘 “더 노력하라, 네 잠재력을 더 끌어내라”고 다그치지만, 복음은 “내가 다 이루었다. 네 힘으로 안 되니 나의 완벽한 승리 안에 들어와 숨어라.”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오늘도 내 삶의 주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염려와 스마트폰을 먼저 보지 않습니다. 나를 완전히 감싸고 계시는 예수님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그분의 진리에 맡기고, 내 밀려오는 두려움을 그분께 가져갑니다. 매일 반복되는 죄책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자랑도, 내 깊은 상처도, 내 불확실한 미래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두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는 삶입니다.
고대 군인들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무겁고 불편하더라도 갑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적의 기습이 언제, 어느 순간에 들이닥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 삶이 아무리 평안하고 괜찮아 보여도 유혹과 낙심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일에만 경건의 갑옷을 입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치열한 월요일에도, 고단한 화요일에도, 외로운 병실에서도, 땀 흘리는 직장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안전한 옷을 항상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3. 우리는 어떻게 싸우는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는, 이제 실제 일상의 전선에서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본문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면 군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무언가 대단한 적을 정복하는 승전보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뜻밖의 명령을 내립니다. "공격하라" 거나 "파괴하라" 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명령은 단 하나, "서라"입니다. 왜 영적 전쟁의 핵심이 '서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미 우리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승리를 얻어내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승리 위에서 그 자리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죄와 사망, 그리고 어둠의 세력에 대한 예수님의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싸움은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불안한 전쟁이 아닙니다. 이미 승패가 결정된 전쟁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승리를 개척하는 군사가 아닙니다. 왕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자리를 믿음으로 끝까지 지켜 서 있는 군사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위로입니까?
여기서 많은 성도들이 밀려오는 자괴감에 낙심합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 자주 넘어집니다. 기도하다가도 낙심하고, 결심했다가도 또 무너집니다. 저는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특징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질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목자와 양의 비유를 기억해 보십시오. 미련한 양 한 마리가 길을 잃고 가시덤불에 걸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습니다. 힘이 다 빠져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양이 스스로 애를 쓰고 다리에 힘을 주어 목자에게 돌아옵니까? 아닙니다. 목자가 거친 산을 넘고 가시투성이의 들판을 헤치며 나아옵니다. 그 지친 양을 발견하고 번쩍 들어 자기 어깨에 맵니다. 양은 자기 다리의 힘이 세서가 아닙니다.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단단히 붙들고 가기 때문에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대적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그 안전한 목자의 어깨 위에서 흔들어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만든 다음,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절망의 참소를 퍼붓습니다. "너 같은 사람이 무슨 성도냐. 하나님이 너 같은 자를 아직도 사랑하시겠냐? 이제 끝이다."라며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예배를 뒤로 미루게 만들고, 말씀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우리에게 외칩니다. 넘어졌습니까? 다시 일어나십시오! 실패했습니까?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울고 있습니까? 다시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가십시오! 목자 되신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 양을 포기하거나 손에서 놓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낙심이 밀려올 때 기도의 자리를 지켜내고, 말씀 앞에 다시 서며,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기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서 있는 삶'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로 얼룩지고 매일 넘어지는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이 거룩하고 완벽한 전신갑주를 선물로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맨몸으로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고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 오늘 우리에게 "전신갑주를 취하라, 갑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위해 싸우신 대장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갑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분의 옷을 무참히 벗겼습니다. 머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채찍으로 그분의 온 등과 몸을 찢었습니다. 사람들은 침을 뱉고 조롱하며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갑옷도 없이, 홀로, 맨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아내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영 죽을 우리에게 당신의 완벽한 의의 옷을 거저 입혀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입은 전신갑주는 우리의 도덕적 공로나 경건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값을 치르고 우리에게 입혀 주신 은혜의 옷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실패하고 흔들릴지라도 다시 소망을 품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다시 걱정이 먼저 밀려올 수도 있고, 삶의 자리로 돌아가면 또 죄를 짓고 낙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갑옷을 빈틈없이 잘 챙겨 입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완전한 갑옷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복잡하고 위험한 시장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금방 한눈을 팝니다. 장난감을 보느라 손에 힘을 스르륵 풀어버리기도 하고, 발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아이가 아버지를 잡은 손의 힘이 세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 가녀린 아이의 손을 결코 놓지 않고 꽉 쥐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안전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은 언젠가 힘이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은 결코 힘이 빠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차갑게 식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결코 식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다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인생의 고단한 전선 앞에서 이 한 가지 진리를 평생토록 가슴에 새기십시오. 성도의 안전은 자신의 손에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 믿음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전신갑주를 입고, 세상 가운데 담대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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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NwaNZZ8Muu0 30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