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정죄를 이기는 복음 (07.19.2026)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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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거짓과 정죄를 이기는 복음 (07.19.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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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80회 작성일 Jul 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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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7월 19일
본문: 에베소서 6:10-14
제목: 거짓과 정죄를 이기는 복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마음은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제가 건강이 아니라 마음의 안녕을 묻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 “거짓과 정죄를 이기는 복음”과 연결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삶의 모든 지경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의 엄연한 현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 복음의 위대한 영광을 깊이 설명한 뒤, 4장부터 6장까지 그 복음에 합당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는 6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 거룩한 삶을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오늘부터는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 첫 번째 무장들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우리는 휴대폰을 집어 듭니다. 밤에 잠들기 전까지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합니다. 그 작은 화면 속으로 끝없이 쏟아지는 뉴스와 영상,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주장들을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주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에는 확신보다 혼란이, 평안보다 피로가 더 쌓여갑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도대체 무엇이 진짜일까?”,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일 거짓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더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다.” “더 젊고 건강해야 가치가 있다.” “남들보다 앞서가야 인정받는다.” “실패하면 끝이다.” “쓸모가 없어지면 사람도 잊혀진다.”

문제는 우리가 그 말을 너무 오래 들은 나머지, 어느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보다 더 진짜처럼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주님, 저는 누구입니까?” 대신 이렇게 묻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이렇게 스스로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분주하기만 합니다. 직장에서는 긴장과 경쟁을 견뎌내고, 가정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끌어안으며, 학교와 일터에서는 맡겨진 책임을 감당하느라 우리는 한 주를 그저 ‘버텨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소음과 경쟁 속에서 겪는 피로감보다 우리를 훨씬 더 깊이, 그리고 은밀하게 지치게 만드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혹시 홀로 방 안에 앉아 있을 때나, 운전을 하고 갈 때, 혹은 늦은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를 만나본 적은 없으십니까?

“너는 절대 안 변해. 늘 똑같잖아.”
“네가 무슨 하나님의 자녀야? 이번에도 또 넘어졌으면서.”
“너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도 결국 실망만 안겨 드리는 존재야.”

신기하게도 이 목소리는 외부에서 확성기를 대고 들려주는 게 아니라, 언제나 고요하게 ‘내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내 깊은 내면에서 스스로 내리는 결론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이 마음의 목소리를 가장 확실한 진짜라고 믿으며 낙심과 자책 속에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영적인 진단을 내려 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지독한 우울과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상처, 삶의 트라우마와 불안감이라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틈타, 사탄은 그 마음의 틈새로 거짓을 더욱 크고 또렷하게 울리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평안과 안식을 깨뜨리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게 만들어 스스로 낙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차디찬 로마의 감옥에 매여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도리어 가슴 벅찬 음성으로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여기서 “서서(히스테미)”라는 명령은 영적 전쟁이라는 문맥 속에서, 내 메마른 힘을 쥐어짜서 새로운 승리를 쟁취하라는 독촉이 아닙니다. 우리의 완벽한 사령관 되신 예수님께서 2천 년 전 골고다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끝내 놓으신 승리, 그 완료된 은혜의 고지 위에서 흔들리지 말고 버텨 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더 잘해내야 한다는 새로운 짐을 지우지 않으십니다. 이미 이겨 놓은 은혜의 자리, 그 사랑의 품 안에서 밀려나지 말고 굳건히 서 있으라고 우리를 부드럽게 초청하십니다.

1. 진리의 허리띠: 흔들리는 내 삶을 붙드시는 주님의 손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 세상은 끊임없이 거짓된 가치관을 주입합니다. 성공해야만 가치 있고, 실패하면 끝이라는 그 목소리들이 마치 내 생각인 양 내면에서 울려 퍼집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제시하는 첫 번째 무장은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라”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에게 허리 띠는 모든 무장과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심이자 시작점이었습니다. 중심이 풀리면 아무리 좋은 무기가 있어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가장 먼저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단지 머리로만 동의하는 딱딱한 성경 지식이나 교리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당에서 고백하는 복음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이 괴리 없이 단단하게 묶여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진리의 허리띠를 띤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진리를 말하면서, 정작 일터와 가정에서는 세상이 정해놓은 ‘성공의 잣대’에 따라 전전긍긍한다면 허리띠가 풀린 군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5절에서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진리된) 것을 말하라…”(에베소서 4:25)

주님의 말씀과 내 삶의 걸음이 정직하게 일치할 때, 사탄이 결코 우리를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을 홀로 상대해 불로 응답받은 승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살해 협박 한마디에 그는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그리고 반복해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14)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극심한 탈진과 두려움이 엘리야의 눈을 가려, 실제로는 존재하는 칠천 명의 신실한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 거짓된 정보였을 뿐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거짓 진단을 곧바로 꾸짖지 않으십니다. 먼저 천사를 보내어 지친 그를 재우시고 떡과 물로 먹이십니다. 몸이 회복된 뒤에야, 하나님은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소리로 찾아오셔서 그의 왜곡된 생각을 진리로 바로잡으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나만 남았다’는 것은 엘리야의 지친 감정이 만들어 낸 거짓이었고, ‘칠천 명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진리였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란 바로 이것입니다. 탈진과 두려움이 그려내는 거짓 현실 대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현실로 내 생각과 삶을 다시 동여매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이 SNS를 보며 “나만 뒤처졌다”고 느낄 때, 그것은 엘리야의 ‘나만 남았거늘’과 똑같은 거짓 진단입니다. 진리는 다르게 말합니다. “너는 내 눈에 가장 소중한 존재다”(신 26:18).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내 인생은 왜 이리 초라할까”하며 자책하는 장년들에게도, 그 탄식은 로뎀나무 아래의 탄식과 같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이제 다 끝나가는구나” 낙심하는 노년의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4)

예수님은 내 감정이나 환경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는 분이 아닙니다. 변치 않는 복음의 진리 위에 우리의 전 삶을 단단히 고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주는 피로감을 떨쳐내고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2. 의의 흉배: 우리의 실패보다 더 큰 예수님의 사랑

두 번째 무장은 “의의 흉배를 붙이라”는 것입니다. 흉배(호심경)는 군인의 가슴과 심장을 보호하는 단단한 갑옷입니다. 심장이 뚫리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으로 우리의 생각을 공격하고, 정죄로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신갑주를 주실 때, 먼저 허리에는 진리를 매게 하시고, 가슴에는 의를 입히셨습니다. 진리가 우리의 생각을 붙든다면, 의의 흉배는 우리의 마음을 보호합니다. 이처럼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는 우리의 영혼을 전방위로 지켜내는 하나님의 단단한 논리입니다.

의의 흉배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사탄이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과 죄책감을 노려 우리를 낙심케 하려고 끊임없이 정죄의 화살을 쏘기 때문입니다. “너 같은 게 무슨 하나님의 자녀야?”, “어제도 똑같이 무너졌으면서 이제 와서 기도하니?”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의 가장 아픈 실패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기서 “의의 흉배를 붙이라”는 명령은 우리의 완벽한 행위로 갑옷을 만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갑옷을 덧입으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결코 완벽할 수 없기에, 내 행위나 율법을 의지하면 사탄의 날카로운 참소를 결코 막아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은 완전한 의만이 내 가슴을 덮는 단단한 강철 판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의를 선물로 받은 자만이, 절망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실제적인 거룩을 추구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참 안타까운 분들을 만납니다. 예배는 빠짐없이 드리는데, 늘 고개를 숙인 채 어두운 얼굴로 앉아 계십니다. 그분들은 누구보다 회개를 많이 하는데도 “매번 똑같은 죄를 짓고 또 나오는 내 모습이 자격이 없는 것 같다”라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분들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완벽한 용서를 믿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무언가 잘하고 깨끗해야만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탄이 던지는 정죄의 화살에 매번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호기롭게 장담했지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 새벽, 대제사장의 뜰에서 닭이 울 때에 베드로는 차마 예수님의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밖으로 나가 통곡했습니다. 처참하게 실패했고, 스스로에게 절망하여 다시 옛 고기잡이 삶으로 도망쳤습니다. 그의 가슴은 자책과 정죄함으로 완전히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로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부끄러워 한사코 고개를 돌리는 베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눈을 따뜻하게 맞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들추며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져 묻지 않습니다. 대신 숯불을 피워 따뜻한 생선을 구워주시며 피로와 죄책감에 지친 베드로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딱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이 인격적인 음성이 베드로의 가슴을 덮고 있던 정죄의 화살을 뽑아내고, 그를 다시 주님의 신실한 사도로 세우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슴에 붙여진 ‘의의 흉배’입니다. 이 의는 나의 깨끗함이 아니라, 우리의 실패보다 훨씬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입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 앞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생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 계신 분이 계십니까? 예배의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는 자격이 없다’라며 스스로를 정죄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마귀가 여러분의 양심을 참소할 때, 여러분의 유약한 행위로 변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내 가슴에 붙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갑옷을 당당히 두드리며 선포하십시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예수님은 우리를 죄 속에서 넘어뜨리는 분이 아니라, 넘어져 있는 우리를 영원한 사랑의 팔로 안아 일으켜 세우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주님의 사랑이 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3. 함께 두르는 전신갑주

지금까지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로 생각을 지키고, 의의 흉배로 마음을 보호하는 법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이 명령한 전신갑주의 모든 명령은, 불굴의 투지로 혼자 싸우는 영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싸우는 군대 전체를 향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전신갑주의 모든 명령, 즉 “허리 띠를 띠고”, “흉배를 붙이라”는 동사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전부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서로의 어깨를 맞댄 ‘교회 공동체 전체’를 향해서 무장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는 세상의 냉대보다 교회에서 더 많은 상처를 받아, 그 누구도 믿지 않기로 결심한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처럼, 공동체 안에서 겪은 판단과 정죄가 여러분의 마음을 굳게  닫도록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차라리 안전하다고 여기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이 교회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화목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너와 나,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 서로를 ‘연결된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홀로 떨어진 성도를 노립니다. 아무리 단단한 의의 흉배를 입었어도, 나 홀로 서 있으면 사탄이 뒤에서 쏘는 정죄의 화살을 막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라는 영적 군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고대 로마 군대의 가장 강력했던 전술인 ‘테스투도(방진)’를 기억하십시오. 군인들이 방패를 맞대어 거대한 지붕을 만들 때, 적들의 화살은 그 틈을 뚫지 못했습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등 뒤를 지켜주고, 서로의 연약한 허리를 복음으로 묶어줄 때, 비로소 우리 공동체는 사탄의 화살을 막아내는 거대한 방패가 됩니다.

의의 흉배는 내 의로움을 자랑할 때가 아니라, 나도, 내 곁의 지체도, 오직 예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견고해집니다.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비난의 눈으로 보지 않고, 십자가의 용납하심으로 덮어줄 때, 사탄은 그 틈을 타지 못합니다.

이번 주일에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여러분의 소중한 가족과 목장 식구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그 십자가의 용납하심을 구체적인 고백으로 먼저 표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방어하던 체면과 위선의 가면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으로 이 세 마디를 먼저 건네 보십시오.

“미안합니다.” (내 의를 내려놓고 평화를 청하는 고백입니다.)
“고맙습니다.” (내 지체로 함께 곁에 있어 줌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랑합니다.” (조건 없이 우리를 품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내 자존심의 허리를 꺾고 미안하다고 먼저 말할 때, 상대방의 존재와 수고에 고맙다고 표현할 때, 그리고 정죄의 눈빛 대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안아줄 때, 사탄의 모든 화살은 소멸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 가운데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 연약하기에 내일 당장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흔들리고 넘어질 것입니다.

물론 사탄은 끊임없이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고, 정죄로 우리를 무너뜨리려 할 것입니다. "너는 부족하다." "너는 실패했다." "너는 사랑받을 수 없다." "너는 이제 끝났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진리로 우리의 생각을 단단히 붙드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의 마음을 영원히 지키십니다. 십자가는 2천 년 동안 언제나 변함없이 소망의 메시지를 줍니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의롭다 하였다." "내가 끝까지 너를 붙들겠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나를 향한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믿음으로 서십시오. 여러분을 붙들고 계신 사령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여러분의 손을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가장 나쁜 면까지도 다 알고도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그 품 안에서 참된 안식과 승리를 누리는 거룩한 군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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