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때, 롯의 때, 그리고 우리 시대 (06.07.2026)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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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노아의 때, 롯의 때, 그리고 우리 시대 (06.07.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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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9회 작성일 Jun 0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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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6월 7일
본문:  누가복음 17:26-30
제목: 노아의 때, 롯의 때, 그리고 우리 시대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세’나 ‘종말’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십니까? 끔찍한 전쟁, 파괴적인 지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대재앙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영화나 미디어가 그려내는 종말의 이미지도 늘 그렇습니다. 공포스럽고, 기괴하고, 먼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을 막 시작한 초신자 분들에게 종말은 기독교의 무서운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당장 내일의 학업과 취업 문제가 급한  청년들에게 종말이란 단어는 마음의 여유를 빼앗는 사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황혼기를 지나며 육신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노년의 성도님들에게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을 나와 상관없는 먼 미래의 이야기로 치부하거나, 아예 외면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님이 직접 묘사하시는 마지막 때의 풍경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말세의 모습을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친숙한 단어들로 종말을 설명하십니다. 본문 27–28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7–28)

여기에 전쟁의 총성이 들리십니까? 기근으로 굶어 죽는 비명이 들리나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가 먹고 마셨고, 기쁘게 결혼식을 올렸으며,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밭에 씨앗을 심고, 멋진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평화롭고 따뜻한 일상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의 풍경도 이와 똑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와 똑같이 직장에 출근해서 일하고, 평소처럼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바로 그 평범한 일상의 한복판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홍수가 터지고, 유황불이 쏟아지듯 임한다는 것입니다. 영화처럼 “종말 카운트 다운” 자막 같은 건 뜨지 않습니다.

오늘 이 아침, 혹시 우리 안에 세상이 주는 안락함에 취해 심판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던 롯의 사위들의 모습은 없을까요? 이 시간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기를 원합니다.

1. 일상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노아와 롯의 때 사람들의 행동 목록을 다시 한번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 이 중에 사회적 지탄을 받을 만한 흉악한 범죄가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도둑질이나 살인, 간음 같은 명백한 악행이 보이나요? 없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행동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창조 명령’에 속하는 아름다운 영역들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고, 가정을 이루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며, 경제를 돌리기 위해 시장에서 사고 팔아야 합니다. 이것은 삶을 파괴하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탱하는 성실한 삶의 고귀한 땀방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언어로 바꾸면 무엇입니까?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종일 애쓰며 수고한 후 퇴근 길에 치맥을 즐기는 청년들의 일상입니다. 건강을 지키려고 아침마다 걷기 운동을 하시는 어르신들의 평범한 일과입니다. 이제 막 신앙을 가져보려고 주일 교회에 나와 조심스럽게 예배드리고, 평일에는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보려는 초신자 분들의 하루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이 사람들을 향해 “악하다, 심판받아 마땅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둔중한 영적 충격을 안겨 줍니다. 물론 일상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 그 평범하고 아름다운 일상이 영혼을 삼키는 늪이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노아 시대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런 그들은 홍수가 나기 직전까지 밥을 먹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부도덕과 폭력이 일상이지만 유황불이 쏟아지던 그날 아침에도 시장 문을 열고 장사를 했습니다.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하고 있었으니까요. 모두가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바로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들은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악하다는 자각조차 없이 멸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의 악독한 죄를 지적하시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지목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도덕적 범죄를 고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악 가운데 살면서도 전혀 깨어 있지 못했던 영적 무감각, 바로 그것을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저들과 우리를 공통으로 묶는 자리가 됩니다.

일상이 무서운 이유는 지금의 일상이 '너무나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일을 마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영상을 보고, 침대에 누우면 뿌듯합니다. 영혼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몸이 배부르면 영적 배고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영원을 생각하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노아 시대 사람들과 같은 영적 무감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취된 사람은 자신이 마취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서서히 진행되는 마취는 고통도 없고, 경보도 울리지 않습니다. 영적 둔감함이 바로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 나는 하나님을 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어제는 아주 피곤해서, 오늘 하루 너무 바빠서, 한 주 한 주가 그냥 흘러가면서—어느 순간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경고하시는 종말의 실제 위기입니다.

2. 눈앞의 안락함은 심판의 ‘갑작스러움’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없이 일상에 안주하는 자들에게 찾아오는 종말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논리를 아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본문을 오해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먹고 마셨다, ‘그래서’ 멸망했다”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을 즐기는 것 자체를 죄로 여겨야 하고, 모든 생업을 내려놓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경고하시는 핵심은 이와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홀연히’ 심판이 임했다.”

평화롭고 안전해 보이는 듯한 그 일상의 안락함이 그만 우리 눈을 가려서 ‘어느 날 갑자기 영원의 심판이 돌연히 들이닥친다’는 엄연한 진리를 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 문을 닫던 그날 아침에도 누군가는 시장에서 생선을 골르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터졌습니다. 단 한 마디의 예고도 없이 말입니다. 소돔의 그날 아침도 평소와 똑같이 해가 떠올랐지만, 롯이 성문을 빠져나가는 순간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비같이 쏟아졌습니다.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창 19:24). ‘비같이’ 쏟아지듯, 멈추지 않고, 순식간에. 그 성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이 그 아침을 마지막으로 맞이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르리라”(살전 5:2). 도둑은 예고하지 않습니다. 집주인이 가장 방심한 그 순간을 노립니다. 집주인이 깊이 잠든 새벽, 가장 평화롭고 조용한 그 순간에 문을 따고 들어옵니다. 심판의 때도 그렇습니다. 세상이 가장 평온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아무런 예고 없이 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갑작스러움은 하나님의 무자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그 방주를 보았고, 날마다 경고를 들었습니다. 롯이 소돔을 떠나던 그 아침, 천사들은 머뭇거리는 롯과 그의 가족의 손을 직접 잡아 성 밖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창 19:16). 심판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의 죄인이라도 돌이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심판 앞에 경고를 먼저 보내십니다. 문제는 경고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경고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롯의 사위들이 심판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무너뜨린 것은 아주 단순하고 익숙한 논리였습니다. “어제도 안전했으니 내일도 안전할 것” 이것이 그들의 영혼을 잠재웠습니다. 오늘 내가 이만큼 성실하게 내 삶을 꾸렸으니 내 미래는 탄탄할 것이라는 착각.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졌기에, 그 안전의 성벽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 소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매일 같은 논리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어제도 괜찮았고, 오늘도 괜찮습니다. 내일도 괜찮을 것입니다. 지금 이 일상이 끝날 것이라고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실감 나지 않음이, 심판의 갑작스러움 앞에서 우리가 가장 무방비 상태가 되는 순간입니다.

3. 우리는 ‘은혜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우리가 정직하게 직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늘 깨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의 과거는 이에 대한 대답을 이미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재림에 대해 들었고, 심판을 들었고, 영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서면 또 잊어버립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이 뜨거워지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세상의 바쁨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우리 역시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소돔 사람들처럼 영적으로 둔감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단순한 무지에서 찾지 않습니다. 문제는 더 근본적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눈앞의 현실을 더 신뢰하며 살아가도록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심판 아래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고, 영원보다 오늘의 안락함을 더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를 복음으로 이끕니다. 이 본문에서 심판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심판 한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을 함께 제시합니다. 노아가 있었습니다. 롯이 있었습니다. 홍수가 온 세상을 뒤덮었지만,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는 살았습니다. 유황불이 소돔 온 성을 덮었지만, 천사의 손에 이끌려 성 밖으로 나온 롯은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구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여호와께서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창 19:16). 노아가 특별히 지혜로워서가 아니었고, 롯이 특별히 용감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결단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있었기에 살았던 것처럼, 롯이 천사의 손에 이끌려 성 밖으로 나왔기에 살았던 것처럼—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심판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받아야 할 홍수를 대신 맞으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유황불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롯의 손을 잡아 이끌었던 천사처럼, 성령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길 때에도 말씀을 통해, 예배를 통해, 때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붙드시고 다시 깨우십니다. 우리는 자주 졸지만,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은 결코 졸지 않으십니다.

한 주 한 주 생존을 위해 지쳐 있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이 경고하시는 것은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기도의 자리를 잠깐 놓친 것을 두고 하시는 것 아닙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통제할 수 있으니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는 완고한 자기 신뢰, 그 완고한 중심을 다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더 강한 의지와 결단이 아닙니다. 내가 심판 앞에 서야 할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에는 분명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같은 밥을 먹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게 됩니다. 같은 직장에 출근해도 오늘이 주님께서 주신 하루임을 의식하게 됩니다. 일상은 똑같아 보이지만, 그 일상을 살아가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 시대 사람들도 그날 아침 눈을 떴습니다. 소돔 사람들도 그날 아침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마지막 아침인 줄 몰랐습니다.

우리도 내일 아침 눈을 뜰 것입니다. 평소처럼 출근하고, 평소처럼 밥을 먹고, 평소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처럼 하루를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오늘 밤, 만일 내일 새벽,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겠습니까?

세상은 종말을 두려움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종말은 공포 영화가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 믿는 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파멸의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신부인 우리를 마침내 영광스럽게 완성하시는 최고의 혼인 잔치이자 승리의 축제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나를 살리신 복음의 은혜 때문에 깨어나서 일상에 매몰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주님이 다시 오심을 기억하고 이를 열망합시다.
아침에 눈을 떠 세상의 염려와 바쁨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전에 이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다. “주님, 오늘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하루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내는 평범한 일상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최고의 예배가 되게 하소서.”

하루를 마감하는 밤에는 “주님, 오늘 밤 주님이 다시 오실지라도, 나는 두려움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신부의 설렘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성도 여러분, 비록 내일 주님이 오실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일터의 밭을 묵묵히 가십시다. 치열하게 삶의 맷돌을 돌리십시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만은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말고, 날마다 주님의 은혜 안에 깨어 있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가슴 벅찬 설렘과 감격으로 다시 오실 왕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권이자 복입니다. 이 복된 소망과 결단이 오늘 예배 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 위에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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