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여우를 잡으라 (05.31.2026)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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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작은 여우를 잡으라 (05.31.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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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8회 작성일 Jun 01 2026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5월 31일
본문:  아가 2장 15-17절
제목: 작은 여우를 잡으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참 따뜻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얼어붙은 인생의 겨울 같던 우리 삶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이제 그만 일어나서 나와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 덕분에 꽁꽁 얼었던 우리의 마음과 가정에도 서서히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딱 이맘때가 문제입니다. 봄이 오고, 새싹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할 때 말입니다. 꼭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정성껏 가꾸어 놓은 포도원을 몰래 망가뜨리는 침입자입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가 2:15)

성도 여러분, 아가서에서 포도원은 사랑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란 사랑을 무너뜨리는 작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정이 무너진다면, 뭔가 엄청난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겠지. 갑작스런 사고나, 큰 배신이나, 상상도 못한 재난 같은 것들, 마치 호랑이나 사자 같은 거대한 맹수가 들이닥쳤야만 가정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말합니다. 소중한 내 가정, 내 인생의 포도원을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범인은 거대한 맹수가 아닙니다. 바로 ‘작은 여우’입니다. 솔로몬 시대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이 포도원을 관리할 때 몸집이 큰 짐승들보다 오히려 작고 귀여운 여우 새끼들을 훨씬 더 경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이 작은 여우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듭니다.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들어오지 않고, 촘촘하게 쌓인 담장의 아주 작은 틈새, 돌무더기 밑을 주인 몰래 기어들어 옵니다.

둘째,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와 통째로 나무를 꺾지 않습니다. 잎사귀 뒤에 교묘하게 숨어서,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연한 순과 어린 가지를 야금야금 갉아먹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햇볕을 피해 포도나무 뿌리 근처에 깊은 구멍을 파고 둥지를 틉니다. 뿌리에 구멍이 뚫리면 어떻게 됩니까? 겉보기엔 잎이 여전히 푸르고 멀쩡해 보입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이미 생명의 근원이 상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무 전체가 서서히 말라 죽습니다.

셋째, 손 쓸 수 없을 때 비로소 문제가 보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눈앞에 드러날 때는 이미 파괴되어 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가정을 처참하게 갉아먹고 있는 작은 여우들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1. 우리 가장 안의 작은 여우들 (15절)

1) 첫 번째 ‘비난’이라는 여우

잠깐 여기서 우리 가정의 일상적인 대화를 떠올려 보십시오. 피곤한 저녁, 식탁에서 무심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당신은 왜 맨날 그 모양이야?”  “네가 하는 짓이 그렇지, 너는 절대 안 변해.”

익숙하게 들리십니까? 놀랍게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향해 잔인한 언어폭력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이건 그냥 내 성격 탓이야.” “화가 나서 감정 표현한 것 뿐이야.”

하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비난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정죄하는 오만함’입니다. 하나님은 내 배우자를, 내 자녀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그 존재를 부정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혀를 일컬어 ‘지옥 불에서 나오는 작은 불씨’와 같다고 경고합니다. 산을 통째로 태우는 거대한 산불도 결국 작은 불씨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무심코 툭 내뱉은 날카로운 말 한마디가 수십 년간 쌓아온 가족 간의 신뢰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듭니다.

비난이 일상이 된 가정은 더 이상 쉼터가 아닙니다. 언제 지뢰가 터질지 모르는 긴장의 공간이 되어 버립니다.

2) 두 번째 ‘당연함’이라는 여우

두 번째 여우는 훨씬 조용하고, 알아채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처음 처음 가정을 꾸렸을 때, 배우자가 끓여준 소박한 국 한 그릇에도 온 마음으로 감동했습니다. 자녀가 내 품에 안겨 쌕쌕거리며 잠자는 모습만으로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부터, 배우자가 밤 늦게 까지 땀 흘려 일하는 것도 당연하고, 집안에서 살림을 돌보는 것도 당연하며, 자녀들이 건강하게 곁에 있는 것도 그냥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왜 문제일까요? 우리가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그 즉시 감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원망과 불평이 독초처럼 자라납니다. 상대방의 수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허물과 약점만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류가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첫 단추를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롬 1:21)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고마워요”라는 말을 건넨 게 언제였습니까? 혹시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3) 세 번째 ‘비교’라는 여우

지난주 스마트폰을 보다가, SNS에 올라온 누군가의 가정을 보며 내 가정이 초라하게 느껴진 적 있으십니까?

“옆집 남편은 이번에 승진해서 연봉이 엄청나게 올랐다는데…”, “누구네 집 아이는 좋은 대학 갔다는데, 우리 애는 왜 이 모양이야?” 오늘날 SNS 화면 속에는 남들의 가장 화려한 순간들만 가득 올라옵니다. 거기에 내 가정을 대입하는 순간, 상처의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비교는 단순히 나쁜 습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주권자이심을 거부하고, 세상의 기준—물질 가치와 성공 신화에 내 마음을 통째로 빼앗겨 버린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가정을 저마다 고유한 모습으로 빚으셨습니다. 빨리 자라 화려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비바람을 맞으며 땅속 깊이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나무도 있습니다. 두 나무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비교라는 여우가 틈타면, 하나님이 오직 우리 가정에만 주신 고유한 축복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되고 맙니다.

오늘 이 아침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빛을 비추어 주셔서, 지금 우리 집 담장을 넘어와 은밀하게 숨어 있는 작은 여우들을 발견하게 하셨습니까? 날카로운 비난입니까? 무감각한 당연함입니까? 아니면 끊임없는 비교입니까? 이 중에 지금 내 가정 안에 뿌리를 내리고 번식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더 깊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비난합니까?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합니까?

사실 비난과 당연함과 비교는 문제의 뿌리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열매일 뿐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우리 마음속 뿌리에 있습니다.성경은 그 뿌리를 ‘죄’라고 부릅니다.
죄란 단순히 나쁜 행동 몇 가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우자가 내 기대를 채워주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자녀가 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가족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고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난이 나옵니다. 그래서 감사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비교가 시작됩니다. 결국 작은 여우의 정체는 단순한 습관이 아닙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오래된 죄성입니다. 가정을 허무는 가장 위험한 여우는 사실 배우자도 아니고 자녀도 아닙니다. 어쩌면 내 안에 살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옛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칫 이 여우들을 단순히 “성격이 좀 모나서 그래”, “살다 보니 생긴 습관이야”라며 가볍게 넘길 수 있습니다. 그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 욕망을 채우고, 나만은 행복해지겠다는 인간의 본성적인 이기심과 부패한 죄성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3. 작은 여우를 잡으라 (15-17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여우들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1) 혼자가 아니라“우리”가 함께 맞서 싸워야 합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주님은 여우를 잡으라고 하실 때, “너를 위하여” 잡으라거나 “나를 위하여” 잡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가정은 네 편 내 편을 갈라 누가 더 잘했고 못했는지를 따지는 재판정이 아닙니다. 함께 같은 적을 향해 싸우는 한 팀입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의 포도원지기들은 여우를 잡을 때 혼자 나서지 않았습니다. 여우는 영악하고 날쌔기 때문에, 온 가족과 이웃이 함께 횃불을 들고 협력해야만 잡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가정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게 다 당신 탓이야”라며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시작하면, 그 틈을 타 여우만 신나게 포도원을 다 파헤쳐 놓을 것입니다. 위기와 갈등이 찾아왔을 때 서로 손을 꼭 잡고, 공동의 적을 맞서 싸워야 합니다. 내 배우자와 내 가족은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편입니다.

2)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작은 여우들의 가장 교활한 특징이 있습니다. 너무 작아서 “지금 당장은 큰일이 나지 않겠지”하는 착각을 심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지혜로운 포도원지기들은 담장 밑에 아주 조그마한 여우 굴의 흔적이라도 발견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즉시 달려가 그 굴을 막았습니다. 시간을 지체하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이 이 ‘골든 타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아가 2:17)

중동의 뜨거운 유대 광야에서 ‘낮’은 태양이 내리쬐고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과 피로의 시간입니다. 지치고 비틀거리는 대낮의 열기가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이 되면, 마침내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한낮의 그림자들도 사그라지기 시작합니다. 즉, 이 고백은 어두운 밤이 올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를 지치게 했던 고단한 삶의 열기가 마침내 물러가고, 당신과 함께 쉼을 누리며 사랑을 속삭일 은혜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으니, 어서 내게로 오라”는 설레는 초청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를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여 먼저 손을 내미십시오.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내가 미안했어, 늘 고마워, 당신을 정말 사랑해." 

이 짧고 진심 어린 한마디를 지금 전하십시오. 그 순종의 한마디가 두껍게 얼어붙은 단절의 빗장을 부수고, 소통의 강물을 다시 흐르게 할 것입니다.

3) 참 포도나무 되신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설교를 들으며 결심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화내지 말아야지.” “이제부터 감사해야지.” “비교하지 말아야지.”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결심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단순히 교육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의지력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마음이 치유되어야 하고, 자기중심적인 죄인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좋은 조언이 아니라 구주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결국 우리를 참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줍니다. 16절을 우리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아가 2:16)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성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생명의 연합’을 예표하는 고백입니다.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다!”

우리는 스스로 사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의 원천으로부터 사랑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가지가 스스로 힘을 짜내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원줄기에 단단히 붙어 있기만 하면, 줄기로부터 신선한 진액이 흘러 들어와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정이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 내 한계를 뛰어넘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위로부터 공급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포도원 한복판에는 밤낮으로 포도원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은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 위에 파수꾼이 사방을 살펴야만, 은밀하게 숨어드는 작은 여우들을 즉각 발견하고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을 지켜내는 영적인 망대는 바로 ‘예배의 망대’요 ‘기도의 망대’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주님을 예배하고, 부부가 손을 맞잡고 기도할 때, 우리 가정에 숨어든 모든 여우의 정체가 드러나고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그 망대 위에 서 오늘도 우리의 가정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신랑이 되셔서 신부인 저와 여러분을 작은 여우들로부터 건져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전부를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예배의 망대, 기도의 망대, 말씀의 망대에서 늘 깨어 있어서 그분께 항상 붙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 주님은 우리 가정을 다시 생명으로 꽃피우기를 원하십니다. 날카로운 비난의 말투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읍시다. 미루었던 용서와 감사를,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지금 즉시 시작합시다. 우리 가족 모두가 주님께 속한 거룩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믿음으로 선포합시다!

차가운 영적 겨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떠나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찬란한 사랑의 꽃을 피워내실 줄 믿습니다!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하늘의 평안과 천국의 기쁨이 오늘 예배 자리에 함께하신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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