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봄으로 나오라 (05.24.2026)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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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7회 작성일 May 25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5월 24일
본문: 아가 2:10-17
제목: 사랑의 봄으로 나오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 5월에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 불리는 아가서를 펼쳤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회가 함께 지키는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2천 년 전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난 기적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말이 통하는 기적’이었습니다. 사방으로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두려움에 떨던 이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아 각기 다른 방언으로 소통하며 하나님의 크신 일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처럼 닫힌 문이 열리고 막힌 대화가 살아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가정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요즘 세상은 참 살기 좋아졌습니다. 멀리 사는 자녀나 손주들과도 전화기 화면으로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듣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세상 모두와는 이렇게 연결이 잘 되는데, 왜 정작 매일 한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가족과의 대화는 갈수록 줄어들까요? 한 식탁에 앉아는 있지만, 마음은 뱅뱅 겉돌고 집안에는 썰렁한 적막만 흐를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개 밖에서는 참 친절합니다. 직장 동료에게는 격식과 예의를 다하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집에만 돌아오면, 가장 소중하고 사랑해야 할 이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사정없이 쏟아내는 것일까요? "가족이니까 당연히 이해해 주겠지"라는 그 안일한 방심이, 우리가 가장 지켜주어야 할 배우자와 자녀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합니다.
여러분, 심리학에는 ‘고슴도치 딜레마(Hedghog's Dilemma)’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날, 고슴도치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고, 아픔을 못 이겨 결국 다시 멀어집니다.
우리의 관계들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사랑하기에 더 가까이 있고 싶은데,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에게 깊은 생채기를 냅니다.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입만 열면 뾰족한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처음 설계하신 가정은 결코 이런 아픔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감탄하셨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 홀로 있는 아담을 보시고 "좋지 않다"고 하시며, 돕는 배필 하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때 아담이 터트린 인류 최초의 사랑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이 고백은 "당신은 곧 또 다른 나입니다. 내 몸처럼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최고의 사랑 고백입니다. 온전한 용납과 연합의 고백입니다.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5)
둘 사이에 수치심이 없고, 거절당할 두려움이 없으며, 오직 온전한 용납만 가득했던 '에덴'이 바로 가정의 원래 모습입니다.
그래서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하면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단란한 울타리만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홀로 삶을 꾸려가시는 어르신들도 많고, 저마다의 이유로 싱글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특정한 형태의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홀로 살 수 없도록 지어졌기에, 혼자 살든 둘이 살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얼어붙은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며, “이제 그만 추운 겨울을 끝내고, 따뜻한 사랑의 봄으로 나오너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아침, 홀로 앓고 있던 외로움을 녹이시고, 가시 돋친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에 귀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1. 사랑의 초청 (10절)
오늘 본문은 마치 얼어붙은 대지를 깨우는 봄바람처럼, 감미로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이 강력한 사랑의 노랫소리로 시작됩니다. 우리 다 함께 아가 2장 10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0)
아가서는 표면적으로는 남녀 간의 애틋하고 숭고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남녀가 서로를 기뻐하고 연모하는 사랑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는 거룩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사랑의 노래를 정경의 중심에 둔 궁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하시는지, 그 ‘언약적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남편'이 되시고,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으셨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신랑이 되고, 교회는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부르심은 단순히 한 남자의 고백이 아니라, 허물 많은 우리를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절절한 구원의 노래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자세히 주목해 보십시오. 사랑을 고백하는 이가 먼저 찾아옵니다. 그가 먼저 이름을 부르고, 그가 먼저 겨울의 문밖에서 기다리며, 그가 먼저 손을 내밉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인간이 온갖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허물 많고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낮은 이 땅에 찾아오신 ‘위대한 사랑의 추적기’입니다.
종종 성도님들은 침체에 빠질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기도를 좀 더 많이 하고 삶이 깨끗해지면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우리 집안의 이 얽힌 문제들이 다 정리되고 평화가 찾아오면, 그때 예배도 회복하고 봉사도 해야지.”
그러나 하나님의 타이밍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조건을 갖춘 ‘봄날’이 아니라, 우리가 죄와 낙심의 ‘겨울 한복판’에서 꽁꽁 얼어붙어 눈물 흘리고 있을 바로 그때, 주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두려움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나무 뒤에 숨어 떨고 있던 아담을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찾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를 배반하고 전 재산을 탕진한 채 돼지 막사에서 주엄열매를 줍던 탕자를 기다리며, 날마다 대문 밖에서 먼 길을 바라보시다가 저 멀리 아들의 실루엣이 보이자마자 맨발로 달려가 목을 안으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부르시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외치시는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원문의 의미를 살려보면, “너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고 나와 함께 걸어가자”라는 강력한 구원의 명령입니다.
그 사랑의 정점이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 신학의 정수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어여쁘다’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 여전히 내 삶이 겨울처럼 춥고 시릴지라도, 내 삶의 문을 먼저 두드리시며 “일어나 함께 가자” 하시는 그 신실하신 언약의 사랑을 의지하여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랑의 봄날 (11-12절)
이어지는 11절과 12절에 등장하는 찬란한 계절의 묘사는,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계절의 대전환을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다 함께 11절과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고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가 2:11-12)
성경에서 ‘겨울’과 ‘비’는 단순한 추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그로 인해 찾아온 ‘영적 침체와 영원한 죽음의 그늘’을 상징합니다.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의 심령과 가정에도 이 지독한 영적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깨어지니까, 부부 사이, 부모 자녀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도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입니다.
한 몸을 이루어야 할 부부가 서로를 향해 비난의 칼날을 겨누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소통의 벽이 높이 세워집니다. 서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급니다. 한 집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도, 뼈가 시린 외로움을 느낍니다.
왜 우리의 가정에 이런 혹독한 겨울이 찾아옵니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메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꺾이면 말라 죽듯, 영적인 공급이 끊어지니 가정이라는 밭도 온기를 잃고 차갑게 얼어붙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위대한 복음의 절대 선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이 겨울의 종료는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친히 개입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메시아적 승리’의 선언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깰 수 없었던 영적 겨울의 빙판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깨뜨리시고, 우리 삶에 은혜의 새 계절을 활짝 열어주셨다는 선포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인류를 묶고 있던 완고한 영적 겨울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사슬에 묶인 자가 자유케 되며, 소외되고 죽어 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진 관계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동안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던 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먼저 문자 하나를 보냅니다. “아버지, 요즘 건강하세요? 식사는 잘하세요?”복음은 그렇게 얼어붙은 겨울을 녹이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얼어붙은 인간의 황폐한 심령 위에 거침없이 찾아와 생명을 피워내는 ‘하나님의 찬란한 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은 여전히 서늘한 겨울입니까? 내 힘으로는 이 차가운 관계의 얼음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미 영적인 겨울은 지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내 삶의 자리에 이미 임한 메시아의 봄날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시는 성령의 역사 앞에 우리의 가정을 내어드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13절)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3)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위대한 영적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깨어진 가정을 회복하는 것은, 단순히 베스트셀러 책에서 나오는 ‘소통 기술’이나 몇 가지 ‘대화 기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좋은 강연을 듣고 처세술을 배워서 임기응변으로 적용한다고 해봤자 가정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 안에는요, 스스로 따뜻한 봄을 만들어낼 생명력도 없고,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힘도 밑천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메말라 있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진짜 가정의 회복은 인간의 노력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이 내 심령의 문을 밀고 들어올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내 완악하고 메마른 심령을 녹여주실 때에만, 수년간 굳게 닫혀 있던 관계의 빗장이 풀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겨울 같은 우리 가정을 향해 다시 한번 초청하십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은 우리에게 혼자 힘으로 그 무거운 가정을 일으켜 세우라고 독촉하지 않으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주님과 손을 잡고 ‘그분과 연합하여 함께 걷는 동행’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어제도 실패했고, 오늘도 불쑥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실패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묻은 대속의 은혜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여전히 내 어여쁜 자다.”
아무런 자격 없는 죄인을 아무 조건 없이 용납해 주시는 이 위대한 은혜가 바로 우리 가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조건 없이 용납하셨다는 이 복음의 은혜를 영혼 깊숙이 경험한 사람만이, 비로소 내 가족을 심판하고 정죄하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당신은 왜 늘 그 모양이야?”, “넌 왜 부모 기대를 이것밖에 채우지 못하니?” 그동안 가족들의 가슴에 사정없이 찔러댔던 그 잔인한 비난의 칼날, 정죄의 칼날을 비로소 내려놓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품어주셨듯, 이제는 내 곁에 있는 배우자를, 내 눈앞에 있는 자녀를 그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구성원들이 완벽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서로를 대할 때 ‘은혜의 복음’은 사라지고, 오직 ‘율법과 행위’로만 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사라진 가정의 식탁에는 숨 막히는 정죄만 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겨울입니다.
오늘 이 아침, 나를 먼저 ‘어여쁜 자’라 불러주신 그 주님의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그리하여 내 힘을 빼고 주님과 함께 걸어감으로,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찬란한 사랑의 봄날을 피워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 상처와 오해, 그리고 깊은 침묵이라는 차가운 겨울 속에 웅크려 앉아 있는 여러분 가정의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피 묻은 손을 내밀어 눈을 맞추며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이제 그만 아픔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를 꽁꽁 묶고 있던 원망과 좌절의 계절은 이미 지나갔단다. 네 힘으로 하려 하지 말고 내 손을 잡으렴. 내가 너희 가정을 친히 고치고, 너희의 거실과 식탁 위에 다시 생명의 꽃을 피워내겠다.”
오늘 이 거룩한 복음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평생을 붙잡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라는 두껍고 무거운 겨울 외투를, 이 아침 예수의 이름 앞에 과감히 벗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서운함의 겨울 외투를 벗으십시오. “다 내 잘못인 것만 같다”라는 죄책감의 무거운 짐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이 십자가로 활짝 열어놓으신 그 눈부신 사랑의 봄을 향해, 오직 주님의 손을 잡고 믿음의 한 걸음을 걸어 나오십시오.
오늘 예배 후 집에 돌아가셔서 먼저 배우자의 손 한번 잡아보십시오. 자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십시오. 오래 미안했던 사람이 있다면 오늘 연락해 보십시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며 은혜의 한마디를 건넬 때, 우리 가정의 얼어붙은 땅 밑에서는 이미 치유와 회복의 기적적인 봄싹이 돋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차가운 겨울문을 열고 주님이 예비하신 사랑의 봄날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복된 성도님들과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날짜: 2026년 5월 24일
본문: 아가 2:10-17
제목: 사랑의 봄으로 나오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 5월에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 불리는 아가서를 펼쳤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회가 함께 지키는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2천 년 전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난 기적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말이 통하는 기적’이었습니다. 사방으로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두려움에 떨던 이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아 각기 다른 방언으로 소통하며 하나님의 크신 일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처럼 닫힌 문이 열리고 막힌 대화가 살아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가정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요즘 세상은 참 살기 좋아졌습니다. 멀리 사는 자녀나 손주들과도 전화기 화면으로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듣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세상 모두와는 이렇게 연결이 잘 되는데, 왜 정작 매일 한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가족과의 대화는 갈수록 줄어들까요? 한 식탁에 앉아는 있지만, 마음은 뱅뱅 겉돌고 집안에는 썰렁한 적막만 흐를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개 밖에서는 참 친절합니다. 직장 동료에게는 격식과 예의를 다하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집에만 돌아오면, 가장 소중하고 사랑해야 할 이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사정없이 쏟아내는 것일까요? "가족이니까 당연히 이해해 주겠지"라는 그 안일한 방심이, 우리가 가장 지켜주어야 할 배우자와 자녀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합니다.
여러분, 심리학에는 ‘고슴도치 딜레마(Hedghog's Dilemma)’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날, 고슴도치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고, 아픔을 못 이겨 결국 다시 멀어집니다.
우리의 관계들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사랑하기에 더 가까이 있고 싶은데,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에게 깊은 생채기를 냅니다.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입만 열면 뾰족한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처음 설계하신 가정은 결코 이런 아픔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감탄하셨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 홀로 있는 아담을 보시고 "좋지 않다"고 하시며, 돕는 배필 하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때 아담이 터트린 인류 최초의 사랑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이 고백은 "당신은 곧 또 다른 나입니다. 내 몸처럼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최고의 사랑 고백입니다. 온전한 용납과 연합의 고백입니다.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5)
둘 사이에 수치심이 없고, 거절당할 두려움이 없으며, 오직 온전한 용납만 가득했던 '에덴'이 바로 가정의 원래 모습입니다.
그래서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하면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단란한 울타리만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홀로 삶을 꾸려가시는 어르신들도 많고, 저마다의 이유로 싱글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특정한 형태의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홀로 살 수 없도록 지어졌기에, 혼자 살든 둘이 살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은 얼어붙은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며, “이제 그만 추운 겨울을 끝내고, 따뜻한 사랑의 봄으로 나오너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아침, 홀로 앓고 있던 외로움을 녹이시고, 가시 돋친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에 귀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1. 사랑의 초청 (10절)
오늘 본문은 마치 얼어붙은 대지를 깨우는 봄바람처럼, 감미로우면서도 거부할 수 없이 강력한 사랑의 노랫소리로 시작됩니다. 우리 다 함께 아가 2장 10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0)
아가서는 표면적으로는 남녀 간의 애틋하고 숭고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남녀가 서로를 기뻐하고 연모하는 사랑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는 거룩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사랑의 노래를 정경의 중심에 둔 궁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하시는지, 그 ‘언약적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남편'이 되시고,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으셨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신랑이 되고, 교회는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부르심은 단순히 한 남자의 고백이 아니라, 허물 많은 우리를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절절한 구원의 노래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자세히 주목해 보십시오. 사랑을 고백하는 이가 먼저 찾아옵니다. 그가 먼저 이름을 부르고, 그가 먼저 겨울의 문밖에서 기다리며, 그가 먼저 손을 내밉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인간이 온갖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허물 많고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낮은 이 땅에 찾아오신 ‘위대한 사랑의 추적기’입니다.
종종 성도님들은 침체에 빠질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기도를 좀 더 많이 하고 삶이 깨끗해지면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우리 집안의 이 얽힌 문제들이 다 정리되고 평화가 찾아오면, 그때 예배도 회복하고 봉사도 해야지.”
그러나 하나님의 타이밍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조건을 갖춘 ‘봄날’이 아니라, 우리가 죄와 낙심의 ‘겨울 한복판’에서 꽁꽁 얼어붙어 눈물 흘리고 있을 바로 그때, 주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두려움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나무 뒤에 숨어 떨고 있던 아담을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찾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를 배반하고 전 재산을 탕진한 채 돼지 막사에서 주엄열매를 줍던 탕자를 기다리며, 날마다 대문 밖에서 먼 길을 바라보시다가 저 멀리 아들의 실루엣이 보이자마자 맨발로 달려가 목을 안으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부르시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외치시는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원문의 의미를 살려보면, “너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고 나와 함께 걸어가자”라는 강력한 구원의 명령입니다.
그 사랑의 정점이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 신학의 정수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어여쁘다’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 여전히 내 삶이 겨울처럼 춥고 시릴지라도, 내 삶의 문을 먼저 두드리시며 “일어나 함께 가자” 하시는 그 신실하신 언약의 사랑을 의지하여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랑의 봄날 (11-12절)
이어지는 11절과 12절에 등장하는 찬란한 계절의 묘사는,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계절의 대전환을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다 함께 11절과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고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가 2:11-12)
성경에서 ‘겨울’과 ‘비’는 단순한 추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그로 인해 찾아온 ‘영적 침체와 영원한 죽음의 그늘’을 상징합니다.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이후, 인간의 심령과 가정에도 이 지독한 영적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깨어지니까, 부부 사이, 부모 자녀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도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입니다.
한 몸을 이루어야 할 부부가 서로를 향해 비난의 칼날을 겨누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소통의 벽이 높이 세워집니다. 서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급니다. 한 집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도, 뼈가 시린 외로움을 느낍니다.
왜 우리의 가정에 이런 혹독한 겨울이 찾아옵니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메말라 버렸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꺾이면 말라 죽듯, 영적인 공급이 끊어지니 가정이라는 밭도 온기를 잃고 차갑게 얼어붙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위대한 복음의 절대 선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이 겨울의 종료는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친히 개입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메시아적 승리’의 선언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깰 수 없었던 영적 겨울의 빙판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깨뜨리시고, 우리 삶에 은혜의 새 계절을 활짝 열어주셨다는 선포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인류를 묶고 있던 완고한 영적 겨울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사슬에 묶인 자가 자유케 되며, 소외되고 죽어 있던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진 관계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동안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던 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먼저 문자 하나를 보냅니다. “아버지, 요즘 건강하세요? 식사는 잘하세요?”복음은 그렇게 얼어붙은 겨울을 녹이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얼어붙은 인간의 황폐한 심령 위에 거침없이 찾아와 생명을 피워내는 ‘하나님의 찬란한 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은 여전히 서늘한 겨울입니까? 내 힘으로는 이 차가운 관계의 얼음을 녹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미 영적인 겨울은 지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내 삶의 자리에 이미 임한 메시아의 봄날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시는 성령의 역사 앞에 우리의 가정을 내어드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13절)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3)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위대한 영적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깨어진 가정을 회복하는 것은, 단순히 베스트셀러 책에서 나오는 ‘소통 기술’이나 몇 가지 ‘대화 기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좋은 강연을 듣고 처세술을 배워서 임기응변으로 적용한다고 해봤자 가정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 안에는요, 스스로 따뜻한 봄을 만들어낼 생명력도 없고,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힘도 밑천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메말라 있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진짜 가정의 회복은 인간의 노력이 끝나는 곳에서,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이 내 심령의 문을 밀고 들어올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내 완악하고 메마른 심령을 녹여주실 때에만, 수년간 굳게 닫혀 있던 관계의 빗장이 풀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겨울 같은 우리 가정을 향해 다시 한번 초청하십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은 우리에게 혼자 힘으로 그 무거운 가정을 일으켜 세우라고 독촉하지 않으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주님과 손을 잡고 ‘그분과 연합하여 함께 걷는 동행’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어제도 실패했고, 오늘도 불쑥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실패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묻은 대속의 은혜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여전히 내 어여쁜 자다.”
아무런 자격 없는 죄인을 아무 조건 없이 용납해 주시는 이 위대한 은혜가 바로 우리 가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조건 없이 용납하셨다는 이 복음의 은혜를 영혼 깊숙이 경험한 사람만이, 비로소 내 가족을 심판하고 정죄하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당신은 왜 늘 그 모양이야?”, “넌 왜 부모 기대를 이것밖에 채우지 못하니?” 그동안 가족들의 가슴에 사정없이 찔러댔던 그 잔인한 비난의 칼날, 정죄의 칼날을 비로소 내려놓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품어주셨듯, 이제는 내 곁에 있는 배우자를, 내 눈앞에 있는 자녀를 그 하나님의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정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구성원들이 완벽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서로를 대할 때 ‘은혜의 복음’은 사라지고, 오직 ‘율법과 행위’로만 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사라진 가정의 식탁에는 숨 막히는 정죄만 남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겨울입니다.
오늘 이 아침, 나를 먼저 ‘어여쁜 자’라 불러주신 그 주님의 은혜를 붙잡으십시오. 그리하여 내 힘을 빼고 주님과 함께 걸어감으로,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찬란한 사랑의 봄날을 피워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 상처와 오해, 그리고 깊은 침묵이라는 차가운 겨울 속에 웅크려 앉아 있는 여러분 가정의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피 묻은 손을 내밀어 눈을 맞추며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이제 그만 아픔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를 꽁꽁 묶고 있던 원망과 좌절의 계절은 이미 지나갔단다. 네 힘으로 하려 하지 말고 내 손을 잡으렴. 내가 너희 가정을 친히 고치고, 너희의 거실과 식탁 위에 다시 생명의 꽃을 피워내겠다.”
오늘 이 거룩한 복음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평생을 붙잡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라는 두껍고 무거운 겨울 외투를, 이 아침 예수의 이름 앞에 과감히 벗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서운함의 겨울 외투를 벗으십시오. “다 내 잘못인 것만 같다”라는 죄책감의 무거운 짐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이 십자가로 활짝 열어놓으신 그 눈부신 사랑의 봄을 향해, 오직 주님의 손을 잡고 믿음의 한 걸음을 걸어 나오십시오.
오늘 예배 후 집에 돌아가셔서 먼저 배우자의 손 한번 잡아보십시오. 자녀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십시오. 오래 미안했던 사람이 있다면 오늘 연락해 보십시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며 은혜의 한마디를 건넬 때, 우리 가정의 얼어붙은 땅 밑에서는 이미 치유와 회복의 기적적인 봄싹이 돋아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차가운 겨울문을 열고 주님이 예비하신 사랑의 봄날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복된 성도님들과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ophVDwXwJMY 15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