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변하여 찬송으로 (05.10.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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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5회 작성일 May 11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5월 10일
본문: 눅 7:11-17
제목: 슬픔이 변하여 찬송으로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은 자녀를 위해 한평생 눈물로 기도의 씨앗을 심어오신 어머니들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어머니날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어버니날로 정하여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이름을 부르지만, 그중에서도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특히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어머니들은 조금 더 특별한 무게를 견디며 살아오셨습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낯선 이 척박한 이민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당신의 이름은 지워버린 채 오직 자녀의 이름만을 붙들고 살아온 세월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손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언제부터인가 거칠어지고 마디마디 굳어버린 그 손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땀 흘린 이민 생활의 훈장입니다. 어머니의 눈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눈가에 맺힌 눈물은 단순히 외로워서 흘린 눈물이 아니라, 자녀가 이 땅에서 주류로 당당히 서길 바라며 하나님 앞에 쏟아낸 기도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그 거친 손 위에서 자랐고, 그 눈물 섞인 기도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과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 교차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나인성이라는 작은 마을 성문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렬과 가장 위대한 생명의 행렬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녀를 잃은 한 어머니의 절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낯선 땅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오신 모든 어머니와 성도들이 인생의 깊은 슬픔 속에서도 하늘로부터 임하는 참된 위로를 발견하여, 그 슬픔이 찬송으로 변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소망의 불이 꺼진 절망의 행렬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인성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사회에서 남편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의지할 사람도, 보호해 줄 울타리도 없이 세상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것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 외롭고 고단한 인생 속에서 이 여인을 붙들어 주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금쪽같은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아들의 웃음이 곧 자신의 기쁨이었고, 아들의 미래가 곧 자신의 소망이었습니다. 어쩌면 밤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괜찮습니다. 이 아이만 지켜주십시오. 이 아이만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아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저 아이가 장성하면 내 인생도 빛을 보게 되겠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눈물로 버텨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덮쳤습니다. 그토록 붙잡고 살았던 단 하나의 소망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가족의 죽음이 아닙니다. 이 어머니에게는 삶의 이유가 사라진 사건입니다.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 일어나야 합니까? 아들의 죽음은 곧 이 어머니 인생 전체의 무너짐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아들의 장례 행렬이 성문을 나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앞에서는 슬픈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뒤에서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어머니와 함께 애통해 하는 마을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그 행렬 한가운데에는 아들의 시신이 담긴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어머니가 서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마음으로 한 번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 시신을 묻으러 관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 어머니의 발걸음, 차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흐느끼는 그 숨소리,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그 울음… 이것은 단순한 장례식이 아닙니다. 소망의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절망의 행렬입니다.
사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모든 인생은 예외없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죽음의 행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간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죽음을 향해 걸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질병과 노쇠, 세상의 불의와 고통, 관계 속에 상처와 무너짐…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죽음의 행렬 속에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이 행렬의 끝에는 차가운 무덤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자리, 가장 절망적인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주님의 긍휼과 공감
절망의 행렬이 성문 밖으로 나가고 있을 때, 마침 성 안으로 들어오시던 또 하나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행렬입니다. 한쪽은 죽음을 향해 성문 밖으로 나가고 있고, 다른 한쪽은 생명을 품고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두 행렬이 성문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절망과 정면으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많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물렀습니다. 바로 울고 있는 한 어머니였습니다. 성경은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가장 깊은 수준의 긍휼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스플랑크나(σπλάγχνα)” 곧 ‘내장’, ‘창자’를 뜻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 머리가 아니라 “창자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단순히 “불쌍하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속이 뒤틀리고, 가슴이 찢어지고,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함께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말 표현으로 하면 “단장(斷腸)의 고통”과 비슷한 정서입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표현을 너무 쉽게 읽지만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머니의 슬픔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겪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녀가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마음, 자녀가 눈물 흘릴 때 “내 속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그 표현, 그것이 바로 이 단어의 감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그 어머니 앞에서 그와 같은 마음으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온전히 대신 느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히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멀리서 위로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그 어머니의 슬픔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눈물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자녀 문제로 눈물 흘리는 어머니에게 “나도 너의 마음을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건강의 고통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이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말할 수 없는 가정의 아픔 속에서 홀로 울고 있는 심령들에게 “나는 너를 보고 있다. 나는 너와 함께 울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만날 때 문제의 즉각적인 해결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위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깊은 공감 속에서 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도 그 주님이 여러분의 자리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3.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통치
예수님은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시신이 담긴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금기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종교적 규범이나 사회적 관습에 묶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멈출 수 있다면, 주님은 스스로 부정해지는 것조차 기꺼이 감수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가장 부정한 자의 자리에 서실 주님의 사랑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갈 3:13) 주님은 이미 이 자리에서 우리 대신 “부정함을 짊어지는 사랑”의 길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관을 붙드시는 순간, 죽음의 행렬이 멈췄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사람들이 당황했습니다. 죽은 시체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인간 상식 밖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습니다. 숨을 쉽니다. 그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떠나고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골로새서 1장 16-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만드신 분이시며 생명을 붙드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죽음도 멈춥니다. 무덤도 열립니다. 생명이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셨고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어요.
성경의 많은 기적은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인성 과부는 믿음을 고백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고쳐달라고 빌 힘도 없이 그저 무너져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먼저 움직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먼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의 믿음이 바닥나고 포기하고 싶을 때조차, 오직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긍휼’ 때문에 먼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난 아들을 어머니의 품에 직접 안겨 주셨습니다. 그 품은 조금 전까지 아들을 잃고 텅 비어 있던 절망의 품이었으나, 이제는 생명의 기쁨으로 가득 찬 축복의 품이 되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 이 과부도, 다시 살아났던 아들도 결국 육신의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상의 기적은 우리에게 잠시의 기쁨을 주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한 부활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봅니다. 오늘 나인성에서 일어난 일은 장차 우리가 맞이할 천국 소망의 그림자, 맛보기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약속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잔인하고 허무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시는 이별이 없고, 다시는 눈물이 없는 영광스러운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날 기쁨과 찬송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날을 맞아, 그동안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쏟아온 여러분의 모든 눈물을 주님께서 친히 닦아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단했던 삶의 상처마다 주님의 위로가 임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든 성도가 이 생명의 행렬에 동참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기쁨으로 다시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낯선 땅에서 자녀를 위해 자존심도, 건강도 다 내어준 어머니의 일생은 너무나 억울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자녀를 위해 흘린 그 모든 기도의 눈물을 친히 유리병에 담아 기억하시고, 그날에 직접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날을 맞아, 그동안 쏟아온 모든 눈물과 고단함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녀 된 여러분께 권면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과부의 눈물을 닦아주셨듯, 여러분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주님의 손길이 되십시오.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가 어머니의 거친 일생을 위로하는 주님의 음성이 될 것입니다.
슬픔의 행렬을 멈추시고 찬송의 행렬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오늘 우리 모든 가정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날짜: 2026년 5월 10일
본문: 눅 7:11-17
제목: 슬픔이 변하여 찬송으로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은 자녀를 위해 한평생 눈물로 기도의 씨앗을 심어오신 어머니들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어머니날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어버니날로 정하여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이름을 부르지만, 그중에서도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특히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어머니들은 조금 더 특별한 무게를 견디며 살아오셨습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낯선 이 척박한 이민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당신의 이름은 지워버린 채 오직 자녀의 이름만을 붙들고 살아온 세월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손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언제부터인가 거칠어지고 마디마디 굳어버린 그 손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땀 흘린 이민 생활의 훈장입니다. 어머니의 눈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눈가에 맺힌 눈물은 단순히 외로워서 흘린 눈물이 아니라, 자녀가 이 땅에서 주류로 당당히 서길 바라며 하나님 앞에 쏟아낸 기도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그 거친 손 위에서 자랐고, 그 눈물 섞인 기도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과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 교차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나인성이라는 작은 마을 성문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행렬과 가장 위대한 생명의 행렬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녀를 잃은 한 어머니의 절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낯선 땅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오신 모든 어머니와 성도들이 인생의 깊은 슬픔 속에서도 하늘로부터 임하는 참된 위로를 발견하여, 그 슬픔이 찬송으로 변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소망의 불이 꺼진 절망의 행렬
갈릴리의 작은 마을 나인성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2천 년 전 유대 사회에서 남편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의지할 사람도, 보호해 줄 울타리도 없이 세상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것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 외롭고 고단한 인생 속에서 이 여인을 붙들어 주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금쪽같은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아들의 웃음이 곧 자신의 기쁨이었고, 아들의 미래가 곧 자신의 소망이었습니다. 어쩌면 밤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괜찮습니다. 이 아이만 지켜주십시오. 이 아이만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아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저 아이가 장성하면 내 인생도 빛을 보게 되겠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눈물로 버텨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덮쳤습니다. 그토록 붙잡고 살았던 단 하나의 소망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가족의 죽음이 아닙니다. 이 어머니에게는 삶의 이유가 사라진 사건입니다.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 일어나야 합니까? 아들의 죽음은 곧 이 어머니 인생 전체의 무너짐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아들의 장례 행렬이 성문을 나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앞에서는 슬픈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뒤에서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어머니와 함께 애통해 하는 마을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그 행렬 한가운데에는 아들의 시신이 담긴 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어머니가 서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마음으로 한 번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 시신을 묻으러 관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 어머니의 발걸음, 차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흐느끼는 그 숨소리,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그 울음… 이것은 단순한 장례식이 아닙니다. 소망의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절망의 행렬입니다.
사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모든 인생은 예외없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죽음의 행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간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죽음을 향해 걸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질병과 노쇠, 세상의 불의와 고통, 관계 속에 상처와 무너짐…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죽음의 행렬 속에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이 행렬의 끝에는 차가운 무덤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자리, 가장 절망적인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주님의 긍휼과 공감
절망의 행렬이 성문 밖으로 나가고 있을 때, 마침 성 안으로 들어오시던 또 하나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행렬입니다. 한쪽은 죽음을 향해 성문 밖으로 나가고 있고, 다른 한쪽은 생명을 품고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두 행렬이 성문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절망과 정면으로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많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물렀습니다. 바로 울고 있는 한 어머니였습니다. 성경은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가장 깊은 수준의 긍휼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스플랑크나(σπλάγχνα)” 곧 ‘내장’, ‘창자’를 뜻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 머리가 아니라 “창자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단순히 “불쌍하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속이 뒤틀리고, 가슴이 찢어지고,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함께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말 표현으로 하면 “단장(斷腸)의 고통”과 비슷한 정서입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표현을 너무 쉽게 읽지만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머니의 슬픔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겪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녀가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마음, 자녀가 눈물 흘릴 때 “내 속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그 표현, 그것이 바로 이 단어의 감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그 어머니 앞에서 그와 같은 마음으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온전히 대신 느낄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히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멀리서 위로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그 어머니의 슬픔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눈물 속으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자녀 문제로 눈물 흘리는 어머니에게 “나도 너의 마음을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건강의 고통 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이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말할 수 없는 가정의 아픔 속에서 홀로 울고 있는 심령들에게 “나는 너를 보고 있다. 나는 너와 함께 울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만날 때 문제의 즉각적인 해결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위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깊은 공감 속에서 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도 그 주님이 여러분의 자리로 다가오고 계십니다.
3.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통치
예수님은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시신이 담긴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금기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종교적 규범이나 사회적 관습에 묶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멈출 수 있다면, 주님은 스스로 부정해지는 것조차 기꺼이 감수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가장 부정한 자의 자리에 서실 주님의 사랑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갈 3:13) 주님은 이미 이 자리에서 우리 대신 “부정함을 짊어지는 사랑”의 길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관을 붙드시는 순간, 죽음의 행렬이 멈췄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사람들이 당황했습니다. 죽은 시체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인간 상식 밖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습니다. 숨을 쉽니다. 그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이 떠나고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골로새서 1장 16-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분명히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만드신 분이시며 생명을 붙드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다시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죽음도 멈춥니다. 무덤도 열립니다. 생명이 돌아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셨고 슬픔을 기쁨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어요.
성경의 많은 기적은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인성 과부는 믿음을 고백할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고쳐달라고 빌 힘도 없이 그저 무너져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먼저 움직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먼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의 믿음이 바닥나고 포기하고 싶을 때조차, 오직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긍휼’ 때문에 먼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불행을 행복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난 아들을 어머니의 품에 직접 안겨 주셨습니다. 그 품은 조금 전까지 아들을 잃고 텅 비어 있던 절망의 품이었으나, 이제는 생명의 기쁨으로 가득 찬 축복의 품이 되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 이 과부도, 다시 살아났던 아들도 결국 육신의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상의 기적은 우리에게 잠시의 기쁨을 주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한 부활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봅니다. 오늘 나인성에서 일어난 일은 장차 우리가 맞이할 천국 소망의 그림자, 맛보기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약속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잔인하고 허무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시는 이별이 없고, 다시는 눈물이 없는 영광스러운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날 기쁨과 찬송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날을 맞아, 그동안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쏟아온 여러분의 모든 눈물을 주님께서 친히 닦아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단했던 삶의 상처마다 주님의 위로가 임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든 성도가 이 생명의 행렬에 동참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기쁨으로 다시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낯선 땅에서 자녀를 위해 자존심도, 건강도 다 내어준 어머니의 일생은 너무나 억울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자녀를 위해 흘린 그 모든 기도의 눈물을 친히 유리병에 담아 기억하시고, 그날에 직접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날을 맞아, 그동안 쏟아온 모든 눈물과 고단함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녀 된 여러분께 권면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과부의 눈물을 닦아주셨듯, 여러분이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주님의 손길이 되십시오.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가 어머니의 거친 일생을 위로하는 주님의 음성이 될 것입니다.
슬픔의 행렬을 멈추시고 찬송의 행렬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오늘 우리 모든 가정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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