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을 사모하라 (01.25.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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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1회 작성일 Jan 26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1월 25일
본문: 디모데전서 3:1-7
제목: 선한 일을 사모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과 로봇이 점차 일상의 풍경이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미래에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세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했습니다. 재주가 뛰어난 ‘난 사람’, 지식이 가득 찬 ‘든 사람’, 그리고 됨됨이가 바른 ‘된 사람’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난 사람’과 ‘든 사람’이 되기 위해 사활을 걸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오고, 방대한 정보를 암기하며, 남들보다 빠르게 계산해내는 능력이 성공의 보증수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난 사람’의 재능과 ‘든 사람’의 지식은 이제 손안의 스마트폰과 로봇이 더 정확하고 빠르게 수행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기계가 지능과 기술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만이 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입니다. 교육학자 전혜성 박사가 강조했던 ‘덕승재(德勝才)’, 즉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는 원리는 이제 단순한 교훈을 넘어, 이 시대를 살아남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인격이란 내 수양으로 닦아 얻어지는 도덕적 성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빚어내시는 ‘생명의 흔적’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 두 차례에 걸쳐 교회 직분자, 제직들을 위해(그러나 모든 교인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교회 일을 맡은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회중 앞에서 교회의 본질과 질서를 몸으로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세워진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무리, 즉 우리 회중이 교회입니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특히 직분자는 그 누구보다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직분자들이 사모해야 할 ‘선한 일’과 그것을 담아낼 ‘인격’의 비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직분: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
초대 교회에는 크게 세 가지의 기본 직제(職制)가 있었습니다.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yteros), 그리고 ‘집사’(diakonos)입니다. 그런데 이 세 직제들은 우리 시대의 직제와는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의 눈높이로 이 세 직제를 해석할 경우 감독이나 장로나 집사는 모두 목회자 급에 해당되는 교회 지도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그 중에서도 교회를 이끌어 가는 장로들의 리더가 감독이었습니다(행 20:28; 빌 1:1; 딤전 4:14; 딛 1:7 참조). 그래서 감독은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며, 돌보고 양을 치며, 진리를 지킬 뿐 아니라 목회의 일을 전반적으로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만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책임감이 무겁고, 부담스러운 자리입니다. 감독직이 좋아 보여 아무나 자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소명의식이 있어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예전 부흥집회에 왔던 목사님이 우스개 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직분자가 자기 속을 썩이며 힘들게 하는 경우에 어떻게 해서 스트레스를 푸느냐, 속으로 이렇게 기도하신답니다. “하나님, 제발 저 사람이나 저 사람의 자녀들이 목사, 선교사, 사모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모두 웃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아주 영특한 자녀가 태어나면 컴퓨터 엔지니어, 금융 투자자, 변호사, 의사 되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애가 대학교에 가더니 은혜 받고 ‘목사가 되겠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말로는 ‘그래, 네가 선택한 것을 응원할께’할지 몰라도 속은 대단히 쓰릴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코스타리카 윤은수 선교사님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매해마다 선교지에 해외단기 선교팀이 찾아온답니다.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찾아오면 낮에는 선교활동을 하고, 밤에는 부흥집회를 하여 많은 아이들이 은혜 받습니다. 마지막 날 선교사님이 그들에게 도전합니다. “너희들 돌아가서 공부 열심히 해 졸업하고, 한 일년, 아니면 몇개월이라도 헌신해서 선교센터에 와서 봉사해 달라”고 호소하면 대부분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간답니다. 그런데 그동안 수많은 선교팀들이 다녀갔지만, 그 약속대로 다시 찾아오는 학생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변심한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극구 말리는 것입니다. “직장을 잡아야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네가 어딜 간다는 말이냐?” 부모들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인데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은 우리에게 매우 도전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여기서 ‘사모한다’는 단어인 헬라어 ‘오레고마이(oregomai)’는 단순히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며칠을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향해 손을 뻗는 간절함, 혹은 결승선을 앞에 둔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앞으로 내미는 갈구함을 뜻합니다. 다른 일이 많이 있는데도 이 일 아니면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제직 여러분, 우리가 올 한 해 진정으로 손을 뻗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장로, 권사, 집사라는 ‘타이틀’ 입니까? 아니면 그 이름이 주는 ‘권위’,‘자리’입니까? 사도 바울은 직분을 얻으려 하는 목적이 반드시 ‘선한 일(Noble task)’에 있어야 한다고 못 박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단순히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도덕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며,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거룩한 책무’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에서 직분이라는 자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거룩한 노동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AI와 직분자의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AI는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Performance)하지만, 영혼을 향한 긍휼의 존재(Presence)가 될 수는 없습니다. AI는 기도문을 작성할 수는 있지만, 성도를 위해 밤새 눈물로 침상을 적실 수는 없습니다.
직분자의 자리는 군림하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아져서 영혼을 껴안는 ‘사랑의 현장’입니다. 기계적인 유능함이 세상을 지배할 수록, 한 영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이 ‘거룩한 열정’이야말로 우리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증명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직분이라는 자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그 직분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실 그 선한 일을 사모하십니까?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2. 왜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하는가: 은혜가 빚어낸 걸작품, 포이에마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선한 일’을 사모하며, 직분에 합당한 ‘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할까요? 단순히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신앙생활의 가장 신비롭고도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순서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생명이 먼저 있어야 그 생명의 역동이 나타나듯,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살아나야 비로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갈 갈망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 존재의 이유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기서 ‘만드신 바’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포이에마(Poiema)’입니다. 오늘날 ‘시(Poem)’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최고의 정성을 들여 완성하신 하나님의 예술 작품, 곧 ‘그분의 걸작품’이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이라는 고귀한 작품을 빚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이 선한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과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거룩한 계획이며, 그 일을 가장 아름답게 수행할 수 있도록 당신의 성품과 달란트, 심지어 과거의 아픔까지도 사용하여 가장 적합하게 빚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자는 결코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행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셔서, 기쁨으로 달려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직 여러분, 올 한 해 우리가 직분을 대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Poiema)이며, 나를 통해 세상에 펼쳐질 하나님의 선한 일이란 곧 ‘나’라는 존재의 찬란한 완성이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이 위대한 기대를 신뢰하며, 그분의 손길에 기꺼이 응답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초대 교회의 직분: 기술자가 아닌 ‘인격자’를 세우다
선한 일을 사모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다면, 이제 그 마음을 담아낼 ‘인격의 그릇’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지도자의 자격 14가지를 나열합니다. 이 14 가지 덕목들은 무엇입니까?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아담(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난폭)하지 아니하여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언제나 위엄을 가지고 자녀들을 순종하게 해야 하며”, “새로 입교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외인(外人)들, 즉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이 목록에는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암기하는가’라든지 ‘행정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가’ 같은 기술적인 요건이 1순위가 아닙니다. 바울이 제시한 14가지 덕목의 핵심은 ‘관계 속에서의 인격’입니다. 왜일까요? 교회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공장이나 회사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로 이어지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2026년, AI 시대에 직분자가 회복해야 할 세 가지 관계에서 나타나야 할 인격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① 자신과의 관계: AI는 모르는 ‘진정성(Authenticity)’
본문은 절제, 신중, 단정을 강조합니다. AI는 프로그래밍된 대로 움직이기에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는 욕망과 성령의 소욕이 싸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아닙니까? 잠언에서 적과 싸워 성을 빼앗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인격은 자신과의 대결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 직분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다스리는,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 직분자는 가벼운 말 한마디로 공동체를 허물지 않도록 생각을 정제하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아랍인들의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반드시 세 개의 대문을 통과한 후에 나가야만 한다. 첫째, 이 말은 거짓이 아니고 진실한 말인가? 둘째, 이 말은 친절한 말인가?, 셋째, 이 말은 반드시 해야만 할 말인가?” 오늘부터 여러분이 던지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신중함에 바탕을 두기 바랍니다!
AI는 아주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논문도 써 줍니다. 아주 탁월한 글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제 그런 화려한 논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서 배어 나오는 진정성, ‘진짜(Authenticity)’에 감동합니다. 내면이 단단한 직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② 가족과의 관계: 데이터가 닿지 않는 ‘사랑의 현장’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합니다. “자기 집을 다스릴 줄 모르면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볼 수 없다.”(5절) 가장 가까운 아내와 남편에게 존경받고, 자녀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 이것은 로봇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입니다. 집에서 먼저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국의 한 목회자가 임종 직전 자녀들에게 “너희에게 내가 어떤 목사였느냐?”라고 묻자, 자녀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가 설교단 위에서 하신 말씀보다, 집에서 우리를 대하셨던 그 인자한 눈빛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참 도전적이고 뼈아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우리의 인격이 발행하는 가장 확실한 보증서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기 가정과 자기 자식들에 대하여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식 농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식 문제는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집에서 먼저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③ 세상과의 관계: ‘환대’와 ‘좋은 평판’
사도 바울은 나그네 대접과 외인에게 받는 좋은 평판을 언급합니다. 교회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외부사람들로 부터도 좋은 소문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 밖에 사람들로부터 “야비하다, 부정직하다, 못돼 먹은 사람이다” 이런 말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윤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정직하고 충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AI 로봇은 매뉴얼에 따라 친절할 수 있지만, 상처받은 이웃의 손을 맞잡고 진심으로 환대하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직분 명이 아니라, 우리의 정직함과 따뜻함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저 집사님을 보니 나도 교회에 가고 싶다", “저 장로님이 거래처라면 나는 믿고 계약하겠다”라는 평판이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열쇠입니다.
결론: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볼테르조차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아내와 하인은 하나님을 믿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손해 보지 않고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조차 본능적으로 압니다. 진정한 신앙은 고결한 인격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장 동료들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합니까, 아니면 안도합니까? “역시 권사님 곁에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라는 말을 듣고 계십니까? 직분은 무엇이 되는 것(To be)이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는 것(To do)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완성하는 엔진은 바로 여러분의 “인격”입니다.
AI가 사람보다 똑똑하게 대답하고, 로봇이 사람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2026년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더 뜨겁게 ‘선한 일’을 사모합시다. 기계는 가질 수 없는 ‘영혼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성품’으로 세상을 감동시킵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 제가 그 선한 일을 사모합니다. 제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을 닮은 ‘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 고백이 올 한 해 여러분의 삶 속에 끊이지 않는 메아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날짜: 2026년 1월 25일
본문: 디모데전서 3:1-7
제목: 선한 일을 사모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과 로봇이 점차 일상의 풍경이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미래에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세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했습니다. 재주가 뛰어난 ‘난 사람’, 지식이 가득 찬 ‘든 사람’, 그리고 됨됨이가 바른 ‘된 사람’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난 사람’과 ‘든 사람’이 되기 위해 사활을 걸었습니다. 일류 대학을 나오고, 방대한 정보를 암기하며, 남들보다 빠르게 계산해내는 능력이 성공의 보증수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난 사람’의 재능과 ‘든 사람’의 지식은 이제 손안의 스마트폰과 로봇이 더 정확하고 빠르게 수행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기계가 지능과 기술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만이 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입니다. 교육학자 전혜성 박사가 강조했던 ‘덕승재(德勝才)’, 즉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는 원리는 이제 단순한 교훈을 넘어, 이 시대를 살아남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인격이란 내 수양으로 닦아 얻어지는 도덕적 성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빚어내시는 ‘생명의 흔적’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 두 차례에 걸쳐 교회 직분자, 제직들을 위해(그러나 모든 교인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교회 일을 맡은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회중 앞에서 교회의 본질과 질서를 몸으로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세워진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무리, 즉 우리 회중이 교회입니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특히 직분자는 그 누구보다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직분자들이 사모해야 할 ‘선한 일’과 그것을 담아낼 ‘인격’의 비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직분: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
초대 교회에는 크게 세 가지의 기본 직제(職制)가 있었습니다. ‘감독’(episkopos)과 ‘장로’(presbyteros), 그리고 ‘집사’(diakonos)입니다. 그런데 이 세 직제들은 우리 시대의 직제와는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의 눈높이로 이 세 직제를 해석할 경우 감독이나 장로나 집사는 모두 목회자 급에 해당되는 교회 지도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그 중에서도 교회를 이끌어 가는 장로들의 리더가 감독이었습니다(행 20:28; 빌 1:1; 딤전 4:14; 딛 1:7 참조). 그래서 감독은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며, 돌보고 양을 치며, 진리를 지킬 뿐 아니라 목회의 일을 전반적으로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만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책임감이 무겁고, 부담스러운 자리입니다. 감독직이 좋아 보여 아무나 자원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소명의식이 있어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예전 부흥집회에 왔던 목사님이 우스개 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느 직분자가 자기 속을 썩이며 힘들게 하는 경우에 어떻게 해서 스트레스를 푸느냐, 속으로 이렇게 기도하신답니다. “하나님, 제발 저 사람이나 저 사람의 자녀들이 목사, 선교사, 사모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모두 웃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아주 영특한 자녀가 태어나면 컴퓨터 엔지니어, 금융 투자자, 변호사, 의사 되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애가 대학교에 가더니 은혜 받고 ‘목사가 되겠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말로는 ‘그래, 네가 선택한 것을 응원할께’할지 몰라도 속은 대단히 쓰릴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코스타리카 윤은수 선교사님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매해마다 선교지에 해외단기 선교팀이 찾아온답니다.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찾아오면 낮에는 선교활동을 하고, 밤에는 부흥집회를 하여 많은 아이들이 은혜 받습니다. 마지막 날 선교사님이 그들에게 도전합니다. “너희들 돌아가서 공부 열심히 해 졸업하고, 한 일년, 아니면 몇개월이라도 헌신해서 선교센터에 와서 봉사해 달라”고 호소하면 대부분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간답니다. 그런데 그동안 수많은 선교팀들이 다녀갔지만, 그 약속대로 다시 찾아오는 학생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변심한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극구 말리는 것입니다. “직장을 잡아야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네가 어딜 간다는 말이냐?” 부모들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인데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은 우리에게 매우 도전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여기서 ‘사모한다’는 단어인 헬라어 ‘오레고마이(oregomai)’는 단순히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며칠을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향해 손을 뻗는 간절함, 혹은 결승선을 앞에 둔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앞으로 내미는 갈구함을 뜻합니다. 다른 일이 많이 있는데도 이 일 아니면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제직 여러분, 우리가 올 한 해 진정으로 손을 뻗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장로, 권사, 집사라는 ‘타이틀’ 입니까? 아니면 그 이름이 주는 ‘권위’,‘자리’입니까? 사도 바울은 직분을 얻으려 하는 목적이 반드시 ‘선한 일(Noble task)’에 있어야 한다고 못 박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란 단순히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도덕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며,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거룩한 책무’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에서 직분이라는 자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거룩한 노동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AI와 직분자의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AI는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Performance)하지만, 영혼을 향한 긍휼의 존재(Presence)가 될 수는 없습니다. AI는 기도문을 작성할 수는 있지만, 성도를 위해 밤새 눈물로 침상을 적실 수는 없습니다.
직분자의 자리는 군림하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아져서 영혼을 껴안는 ‘사랑의 현장’입니다. 기계적인 유능함이 세상을 지배할 수록, 한 영혼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이 ‘거룩한 열정’이야말로 우리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증명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직분이라는 자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그 직분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실 그 선한 일을 사모하십니까? 바라기는 우리 교회에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2. 왜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하는가: 은혜가 빚어낸 걸작품, 포이에마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선한 일’을 사모하며, 직분에 합당한 ‘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할까요? 단순히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신앙생활의 가장 신비롭고도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순서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생명이 먼저 있어야 그 생명의 역동이 나타나듯,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살아나야 비로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갈 갈망이 생겨나는 법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 존재의 이유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기서 ‘만드신 바’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포이에마(Poiema)’입니다. 오늘날 ‘시(Poem)’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최고의 정성을 들여 완성하신 하나님의 예술 작품, 곧 ‘그분의 걸작품’이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이라는 고귀한 작품을 빚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이 선한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과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거룩한 계획이며, 그 일을 가장 아름답게 수행할 수 있도록 당신의 성품과 달란트, 심지어 과거의 아픔까지도 사용하여 가장 적합하게 빚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자는 결코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행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심어주셔서, 기쁨으로 달려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직 여러분, 올 한 해 우리가 직분을 대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Poiema)이며, 나를 통해 세상에 펼쳐질 하나님의 선한 일이란 곧 ‘나’라는 존재의 찬란한 완성이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이 위대한 기대를 신뢰하며, 그분의 손길에 기꺼이 응답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초대 교회의 직분: 기술자가 아닌 ‘인격자’를 세우다
선한 일을 사모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다면, 이제 그 마음을 담아낼 ‘인격의 그릇’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지도자의 자격 14가지를 나열합니다. 이 14 가지 덕목들은 무엇입니까?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아담(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난폭)하지 아니하여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언제나 위엄을 가지고 자녀들을 순종하게 해야 하며”, “새로 입교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외인(外人)들, 즉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이 목록에는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암기하는가’라든지 ‘행정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가’ 같은 기술적인 요건이 1순위가 아닙니다. 바울이 제시한 14가지 덕목의 핵심은 ‘관계 속에서의 인격’입니다. 왜일까요? 교회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공장이나 회사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로 이어지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2026년, AI 시대에 직분자가 회복해야 할 세 가지 관계에서 나타나야 할 인격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① 자신과의 관계: AI는 모르는 ‘진정성(Authenticity)’
본문은 절제, 신중, 단정을 강조합니다. AI는 프로그래밍된 대로 움직이기에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우리 안에는 끊임없는 욕망과 성령의 소욕이 싸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아닙니까? 잠언에서 적과 싸워 성을 빼앗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인격은 자신과의 대결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 직분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다스리는,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 직분자는 가벼운 말 한마디로 공동체를 허물지 않도록 생각을 정제하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아랍인들의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반드시 세 개의 대문을 통과한 후에 나가야만 한다. 첫째, 이 말은 거짓이 아니고 진실한 말인가? 둘째, 이 말은 친절한 말인가?, 셋째, 이 말은 반드시 해야만 할 말인가?” 오늘부터 여러분이 던지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신중함에 바탕을 두기 바랍니다!
AI는 아주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논문도 써 줍니다. 아주 탁월한 글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제 그런 화려한 논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서 배어 나오는 진정성, ‘진짜(Authenticity)’에 감동합니다. 내면이 단단한 직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② 가족과의 관계: 데이터가 닿지 않는 ‘사랑의 현장’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합니다. “자기 집을 다스릴 줄 모르면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볼 수 없다.”(5절) 가장 가까운 아내와 남편에게 존경받고, 자녀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 이것은 로봇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입니다. 집에서 먼저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국의 한 목회자가 임종 직전 자녀들에게 “너희에게 내가 어떤 목사였느냐?”라고 묻자, 자녀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가 설교단 위에서 하신 말씀보다, 집에서 우리를 대하셨던 그 인자한 눈빛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참 도전적이고 뼈아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우리의 인격이 발행하는 가장 확실한 보증서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기 가정과 자기 자식들에 대하여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식 농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식 문제는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집에서 먼저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③ 세상과의 관계: ‘환대’와 ‘좋은 평판’
사도 바울은 나그네 대접과 외인에게 받는 좋은 평판을 언급합니다. 교회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외부사람들로 부터도 좋은 소문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 밖에 사람들로부터 “야비하다, 부정직하다, 못돼 먹은 사람이다” 이런 말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윤리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정직하고 충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AI 로봇은 매뉴얼에 따라 친절할 수 있지만, 상처받은 이웃의 손을 맞잡고 진심으로 환대하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직분 명이 아니라, 우리의 정직함과 따뜻함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저 집사님을 보니 나도 교회에 가고 싶다", “저 장로님이 거래처라면 나는 믿고 계약하겠다”라는 평판이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열쇠입니다.
결론: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볼테르조차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아내와 하인은 하나님을 믿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손해 보지 않고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조차 본능적으로 압니다. 진정한 신앙은 고결한 인격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장 동료들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합니까, 아니면 안도합니까? “역시 권사님 곁에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라는 말을 듣고 계십니까? 직분은 무엇이 되는 것(To be)이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는 것(To do)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완성하는 엔진은 바로 여러분의 “인격”입니다.
AI가 사람보다 똑똑하게 대답하고, 로봇이 사람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2026년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더 뜨겁게 ‘선한 일’을 사모합시다. 기계는 가질 수 없는 ‘영혼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성품’으로 세상을 감동시킵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 제가 그 선한 일을 사모합니다. 제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을 닮은 ‘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이 고백이 올 한 해 여러분의 삶 속에 끊이지 않는 메아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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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Ow8ysKDoN2o 14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