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위 (02.01.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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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8회 작성일 Feb 02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2월 1일
본문: 딤전 3:8-16
제목:아름다운 지위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요즘 뉴스를 보기가 참 두렵고 마음이 무거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내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 그리고 멈추지 않는 국제적인 전쟁 소식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듭니다. 치솟는 물가와 경제적 불확실성 속에서, 현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매일 여러 개의 명함을 바꿔 쓰며 분투합니다.
직장에서는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생존자’로, 집에서는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며 애타는 ‘부모’로, 또 SNS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 행복을 연기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세상의 파도가 이렇게 높게 몰아칠 때, 그 수많은 이름표 속에 숨겨진 ‘진짜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급변하는 세상 기준에 맞추느라 여러분의 영혼이 하얗게 마모되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집사’라는 직분의 자격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교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성적표”나 “지켜야 할 까다로운 규칙”으로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규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이름표에 가려져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으라는 초대장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아름다운 지위’는 교회 안의 계급이나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나 경제, 환경이 아무리 흔들려도 결코 변하지 않는 ‘가장 품격 있고, 가장 인간다운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는 말씀에 비추어 “나는 부족해서 저런 자격이 안 된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완벽해서 넘어지지 않는 ‘슈퍼맨’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풍파에 넘어질지언정,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나와 “주님, 부족한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세우려 하십니다.
불안한 2026년의 한복판에서, 깨진 우리의 인격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길로 다시 빛나는 보석이 될 수 있는지, 그 영광스러운 비밀을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1. 창조의 영광과 잃어버린 지위
우리가 직분자의 자격을 다루기 전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인격과 성품의 기준을 요구하시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답은 창세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유독 인간만 하나님을 닮은 원래 우리 모습, 즉‘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형이 닮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었고, 그분의 뜻을 대행하는 ‘왕의 대리인’입니다. 왕의 대리인은 왕의 성품을 그대로 투영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신실함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었고, 그분의 뜻을 집행하는 ‘대리인’이였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가졌던 최초이자 최상의 ‘아름다운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이 아름다운 지위는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거울은 깨졌고 통치 질서는 뒤집혔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만물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도리어 ‘물질’과 ‘탐욕’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창조의 목적이 뒤틀리자 가장 먼저 망가진 것은 우리의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야 할 입술은 나를 방어하기 위한 거짓과 남을 깎아내리는 비방으로 얼룩졌습니다. 타락은 곧 ‘인간답지 못함’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나열하는 집사의 자격들—단정함, 일구이언하지 않음, 절제, 깨끗한 양심—을 보십시오. 이것들은 단순히 교회 봉사를 잘하기 위한 '봉사 기술' 목록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체크리스트입니다.
• 일구이언하지 않음(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음)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품을,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음(정직하지 못한 돈에 욕심내지 않고) 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풍성함을,
• 깨끗한 양심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로 세움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일을 맡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통해 깨진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복원해 내겠다”는 영광스러운 선언입니다. 직분자는 그 복원 과정을 성도들 앞에서 미리 보여주는 ‘복음의 샘플’과도 같습니다. 외교관이 외국에서 국가의 얼굴로 대표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외교관과 같습니다.
2. 직분자의 덕목: 성품으로 증명되는 구속의 은혜
바울은 직분자의 자질을 나열하며 재능이나 능력을 묻지 않습니다. 대신 그 사람의 성품, 인격과 언어, 물질관을 묻습니다. 왜일까요? 성품은 그 사람의 영혼이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성적표이기 때문입니다.
1) 언어의 구속: 하나님을 닮은 진실함 (8절)
바울은 가장 먼저 ‘단정함’과 ‘일구이언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단정함’은 단순히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삶의 무게’를 뜻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음을 알고, 그 무게를 견디며 신중하게 행보하는 믿음의 듬직함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고 있기에 함부로 처신할 수 없는 ‘거룩한 무게감’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구이언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정함’이 나무 뿌리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의 묵직한 존재감이라면, 그 뿌리에서 뻗어 나와 세상과 접촉하는 신뢰의 줄기로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가장 먼저 나타난 증상이 입술의 분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를 대고, 사람 앞에서는 책임을 전가합니다. 즉, ‘일구이언’은 단순히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영혼이 분열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직분자가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심어졌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우리 영혼을 통과했다면, 가장 먼저 정복당해야 할 지체는 ‘혀’입니다. 가령 기도 부탁을 받고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막상 바쁜 월요일이 되면 그 약속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회의 자리에서는 침묵하고, 뒤에서는 불평하며 마음을 풀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악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복음과 삶 사이에 간격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직분자의 삶은 완벽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간격을 외면하지 않고 말과 삶을 하나로 좁혀 가려는 싸움입니다.
2026년에는 우리 직분자들의 진실한 언어생활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통로가 되기 원합니다.
2) 욕망의 구속: 물질보다 크신 하나님 (8절)
‘술에 인박이지(중독)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은 단순히 중독과 탐욕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내 결핍을 채우는가’에 대한 신앙적 질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영혼의 빈자리를 술(쾌락)이나 돈(권력)으로 채우려 합니다. 물질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집사는 교회의 재정과 구제를 맡는 사람입니다. 그가 돈 앞에서 정직할 수 있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영적 부요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양심을 지키는 직분자의 모습은, 말로 설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손에 내 삶을 맡긴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3) 양심의 구속: 믿음의 비밀을 담는 그릇 (9, 16절)
바울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의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내 마음의 양심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은 16절에서 말하는 ‘경건의 비밀’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육신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복음이 내 양심을 두드리고 있는 상태가 참된 신앙입니다. 복음이 교리로만 남으면 위선자가 되지만, 복음이 양심과 만나면 ‘인격’이 됩니다. 직분자는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지식이 양심을 통과하여 삶의 향기로 배어 나오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인 이유는 건물이 튼튼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비밀을 양심으로 지켜내는 성도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가정의 관리 능력(Oikonomia)과 실무 지혜
바울은 집사의 자격을 말하면서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을 핵심 조건으로 제시합니다(12절). 이는 단순히 가정교육이나 윤리적 모범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기준은 한 사람의 신앙이 예배당이라는 보호된 공간을 넘어, 삶의 가장 현실적이고 반복적인 현장에서도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묻는 가장 정직하고도 실제적인 시험대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가정은 단순한 사적 공간이 아닙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작은 공동체, 다시 말해 ‘최소 단위의 교회’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다스리다’라는 표현은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 에서 나온 말로, 이는 단순한 통제가 아니라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돌보는 청지기의 직분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창 2:15)는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검증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맡기시기 전에, 그가 이미 맡겨진 작은 공동체—가정—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이 가장 가식 없이 드러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밖에서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가정에서는 가장 쉽게 무너지고, 가장 솔직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스림’은 결코 가부장적 권위나 통제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다스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방식, 곧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으로 책임지는 리더십입니다. 말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방식입니다.
진짜 신앙은 예배당의 조명 아래서가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거실 소파 위에서 증명됩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내 피로함을 앞세우기보다 배우자의 하루를 먼저 헤아리는 인내,
아이의 성적 앞에서 분노로 반응하기보다 그 아이의 영혼이 세상의 가치관에 잠식되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는 기도와 기다림—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다스림’의 실제 모습입니다.
만약 교회에서는 충성된 집사로 보이지만, 가정에서는 대화가 단절된 독재자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복음이 가정의 자리까지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정죄가 아니라 초청입니다. 복음은 예배당에만 머무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공간까지 회복하기 위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아내의 남편’, ‘자녀를 잘 다스리는 자’를 직분의 조건으로 제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신실함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라는 공적 영역에서도 결국 같은 시험 앞에 서게 됩니다. 반대로, 가정에서 이미 사랑과 책임으로 씨름해 본 사람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원리로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이미 ‘작은 하나님 나라’를 충성되게 섬겨 본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일 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진리의 기둥과 터’로 굳게 서게 됩니다(15절). 그러므로 가정을 돌보는 일은 개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구속의 목적을 삶으로 이어가는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4. 검증된 직분자와 약속된 상급
바울은 직분자를 세울 때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맡기라”고 권면합니다(10절). 이는 사람을 의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은 ‘찰나의 열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과 밖, 주일과 평일이 일치되는 ‘통합된 삶’을 살아낸 이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두 가지 찬란한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1) 아름다운 지위(Bathmos): 첫 번째 상급은 ‘아름다운 지위’입니다. 여기서 지위를 뜻하는 헬라어 ‘바트모스(Bathmos)’는 계단의 층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들보다 위에 서는 계급적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계단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위는 창세기에서 잃어버렸던 그 ‘대리 통치자’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복원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께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인정을 받고, 성도와 세상으로부터는 “과연 저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라는 영적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세상은 명함의 글자를 높이려 애쓰지만, 성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삶의 무게’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지위입니다.
2) 믿음의 큰 담력: 두 번째 상급은 ‘믿음의 큰 담력’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격이 대범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의 비밀을 삶으로 살아낸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영적 배짱’입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사를 보십시오. 그는 죽음의 돌팔매가 날아오는 현장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그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렸기에, 세상의 위협보다 주님의 영광이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자에게만 허락되는 영적 담대함입니다.
3) 직분, 가장 영광스러운 초청 (Conclusion of the point) 성도 여러분, 직분은 우리를 구속하는 사슬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비천한 죄인의 자리에서 끌어올려,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검증의 과정을 통과하십시오. 삶의 일관성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끝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이 땅에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거룩한 담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분은 우리를 옭아매는 사슬이 아닙니다. 비천한 죄인인 우리를 끌어올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1) 직분은 명예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를 묻지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나를 닮아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명함에 새겨진 직함보다, 여러분의 인격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2) 직분은 짐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혹시 오늘 나열된 자격들 앞에서 ‘나는 가망이 없다’며 고개를 숙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직분자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입어기에 나도 기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3) 이제 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증명하십시오. 세상은 이제 우리의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의 ‘삶’을 읽습니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지위’를 증명하기 위해 어떤 위대한 일을 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대신 딱 한 가지,
• 내일 아침 출근하는 직장에서, 누군가 나를 비난할 때, 똑같이 갚아주지 않고 침묵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지위’를 지키는 집사님의 모습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읽을 것입니다.
• 가정에서 서로 발을 씻기는 여러분의 손길을 통해 자라나는 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배울 것입니다.
•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교회에서 따뜻한 미소와 함께 친절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의 넉넉함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복음의 비밀을 양심에 담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세상이 감당 못 할 ‘믿음의 큰 담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비추는 ‘아름다운 지위’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곧 지성소입니다. 여러분의 성품이 곧 복음의 전단지입니다. 이번 한 주간, 그리스도를 심장에 품고 말과 삶이 하나 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십시오. 장차 영광 가운데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참으로 아름다운 지위에 있었구나!”라는 주님의 자비로운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짜: 2026년 2월 1일
본문: 딤전 3:8-16
제목:아름다운 지위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성도 여러분, 요즘 뉴스를 보기가 참 두렵고 마음이 무거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내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 그리고 멈추지 않는 국제적인 전쟁 소식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듭니다. 치솟는 물가와 경제적 불확실성 속에서, 현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매일 여러 개의 명함을 바꿔 쓰며 분투합니다.
직장에서는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생존자’로, 집에서는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며 애타는 ‘부모’로, 또 SNS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 행복을 연기하는 ‘주인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세상의 파도가 이렇게 높게 몰아칠 때, 그 수많은 이름표 속에 숨겨진 ‘진짜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급변하는 세상 기준에 맞추느라 여러분의 영혼이 하얗게 마모되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집사’라는 직분의 자격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교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성적표”나 “지켜야 할 까다로운 규칙”으로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규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이름표에 가려져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으라는 초대장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아름다운 지위’는 교회 안의 계급이나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나 경제, 환경이 아무리 흔들려도 결코 변하지 않는 ‘가장 품격 있고, 가장 인간다운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는 말씀에 비추어 “나는 부족해서 저런 자격이 안 된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완벽해서 넘어지지 않는 ‘슈퍼맨’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풍파에 넘어질지언정,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앞으로 나와 “주님, 부족한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세우려 하십니다.
불안한 2026년의 한복판에서, 깨진 우리의 인격이 어떻게 하나님의 손길로 다시 빛나는 보석이 될 수 있는지, 그 영광스러운 비밀을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1. 창조의 영광과 잃어버린 지위
우리가 직분자의 자격을 다루기 전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인격과 성품의 기준을 요구하시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답은 창세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유독 인간만 하나님을 닮은 원래 우리 모습, 즉‘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형이 닮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었고, 그분의 뜻을 대행하는 ‘왕의 대리인’입니다. 왕의 대리인은 왕의 성품을 그대로 투영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신실함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었고, 그분의 뜻을 집행하는 ‘대리인’이였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가졌던 최초이자 최상의 ‘아름다운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이 아름다운 지위는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거울은 깨졌고 통치 질서는 뒤집혔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만물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도리어 ‘물질’과 ‘탐욕’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창조의 목적이 뒤틀리자 가장 먼저 망가진 것은 우리의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야 할 입술은 나를 방어하기 위한 거짓과 남을 깎아내리는 비방으로 얼룩졌습니다. 타락은 곧 ‘인간답지 못함’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나열하는 집사의 자격들—단정함, 일구이언하지 않음, 절제, 깨끗한 양심—을 보십시오. 이것들은 단순히 교회 봉사를 잘하기 위한 '봉사 기술' 목록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체크리스트입니다.
• 일구이언하지 않음(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음)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품을,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음(정직하지 못한 돈에 욕심내지 않고) 은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풍성함을,
• 깨끗한 양심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로 세움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일을 맡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통해 깨진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복원해 내겠다”는 영광스러운 선언입니다. 직분자는 그 복원 과정을 성도들 앞에서 미리 보여주는 ‘복음의 샘플’과도 같습니다. 외교관이 외국에서 국가의 얼굴로 대표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외교관과 같습니다.
2. 직분자의 덕목: 성품으로 증명되는 구속의 은혜
바울은 직분자의 자질을 나열하며 재능이나 능력을 묻지 않습니다. 대신 그 사람의 성품, 인격과 언어, 물질관을 묻습니다. 왜일까요? 성품은 그 사람의 영혼이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성적표이기 때문입니다.
1) 언어의 구속: 하나님을 닮은 진실함 (8절)
바울은 가장 먼저 ‘단정함’과 ‘일구이언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단정함’은 단순히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의 ‘삶의 무게’를 뜻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음을 알고, 그 무게를 견디며 신중하게 행보하는 믿음의 듬직함을 갖추라는 뜻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고 있기에 함부로 처신할 수 없는 ‘거룩한 무게감’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구이언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정함’이 나무 뿌리와 같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의 묵직한 존재감이라면, 그 뿌리에서 뻗어 나와 세상과 접촉하는 신뢰의 줄기로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가장 먼저 나타난 증상이 입술의 분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를 대고, 사람 앞에서는 책임을 전가합니다. 즉, ‘일구이언’은 단순히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기술적 결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영혼이 분열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직분자가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심어졌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우리 영혼을 통과했다면, 가장 먼저 정복당해야 할 지체는 ‘혀’입니다. 가령 기도 부탁을 받고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막상 바쁜 월요일이 되면 그 약속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회의 자리에서는 침묵하고, 뒤에서는 불평하며 마음을 풀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악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복음과 삶 사이에 간격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직분자의 삶은 완벽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간격을 외면하지 않고 말과 삶을 하나로 좁혀 가려는 싸움입니다.
2026년에는 우리 직분자들의 진실한 언어생활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통로가 되기 원합니다.
2) 욕망의 구속: 물질보다 크신 하나님 (8절)
‘술에 인박이지(중독)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은 단순히 중독과 탐욕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내 결핍을 채우는가’에 대한 신앙적 질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으로 채워야 할 영혼의 빈자리를 술(쾌락)이나 돈(권력)으로 채우려 합니다. 물질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집사는 교회의 재정과 구제를 맡는 사람입니다. 그가 돈 앞에서 정직할 수 있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영적 부요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양심을 지키는 직분자의 모습은, 말로 설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손에 내 삶을 맡긴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3) 양심의 구속: 믿음의 비밀을 담는 그릇 (9, 16절)
바울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의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내 마음의 양심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은 16절에서 말하는 ‘경건의 비밀’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육신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복음이 내 양심을 두드리고 있는 상태가 참된 신앙입니다. 복음이 교리로만 남으면 위선자가 되지만, 복음이 양심과 만나면 ‘인격’이 됩니다. 직분자는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지식이 양심을 통과하여 삶의 향기로 배어 나오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인 이유는 건물이 튼튼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비밀을 양심으로 지켜내는 성도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가정의 관리 능력(Oikonomia)과 실무 지혜
바울은 집사의 자격을 말하면서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을 핵심 조건으로 제시합니다(12절). 이는 단순히 가정교육이나 윤리적 모범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기준은 한 사람의 신앙이 예배당이라는 보호된 공간을 넘어, 삶의 가장 현실적이고 반복적인 현장에서도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묻는 가장 정직하고도 실제적인 시험대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가정은 단순한 사적 공간이 아닙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작은 공동체, 다시 말해 ‘최소 단위의 교회’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다스리다’라는 표현은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 에서 나온 말로, 이는 단순한 통제가 아니라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돌보는 청지기의 직분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창 2:15)는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검증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맡기시기 전에, 그가 이미 맡겨진 작은 공동체—가정—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이 가장 가식 없이 드러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밖에서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가정에서는 가장 쉽게 무너지고, 가장 솔직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스림’은 결코 가부장적 권위나 통제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다스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스리시는 방식, 곧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으로 책임지는 리더십입니다. 말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방식입니다.
진짜 신앙은 예배당의 조명 아래서가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거실 소파 위에서 증명됩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내 피로함을 앞세우기보다 배우자의 하루를 먼저 헤아리는 인내,
아이의 성적 앞에서 분노로 반응하기보다 그 아이의 영혼이 세상의 가치관에 잠식되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는 기도와 기다림—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다스림’의 실제 모습입니다.
만약 교회에서는 충성된 집사로 보이지만, 가정에서는 대화가 단절된 독재자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복음이 가정의 자리까지 충분히 스며들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정죄가 아니라 초청입니다. 복음은 예배당에만 머무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공간까지 회복하기 위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아내의 남편’, ‘자녀를 잘 다스리는 자’를 직분의 조건으로 제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신실함을 선택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라는 공적 영역에서도 결국 같은 시험 앞에 서게 됩니다. 반대로, 가정에서 이미 사랑과 책임으로 씨름해 본 사람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원리로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이미 ‘작은 하나님 나라’를 충성되게 섬겨 본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일 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진리의 기둥과 터’로 굳게 서게 됩니다(15절). 그러므로 가정을 돌보는 일은 개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구속의 목적을 삶으로 이어가는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4. 검증된 직분자와 약속된 상급
바울은 직분자를 세울 때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맡기라”고 권면합니다(10절). 이는 사람을 의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은 ‘찰나의 열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과 밖, 주일과 평일이 일치되는 ‘통합된 삶’을 살아낸 이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두 가지 찬란한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1) 아름다운 지위(Bathmos): 첫 번째 상급은 ‘아름다운 지위’입니다. 여기서 지위를 뜻하는 헬라어 ‘바트모스(Bathmos)’는 계단의 층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들보다 위에 서는 계급적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계단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위는 창세기에서 잃어버렸던 그 ‘대리 통치자’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복원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께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인정을 받고, 성도와 세상으로부터는 “과연 저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라는 영적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세상은 명함의 글자를 높이려 애쓰지만, 성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삶의 무게’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지위입니다.
2) 믿음의 큰 담력: 두 번째 상급은 ‘믿음의 큰 담력’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격이 대범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의 비밀을 삶으로 살아낸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영적 배짱’입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사를 보십시오. 그는 죽음의 돌팔매가 날아오는 현장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그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렸기에, 세상의 위협보다 주님의 영광이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된 자에게만 허락되는 영적 담대함입니다.
3) 직분, 가장 영광스러운 초청 (Conclusion of the point) 성도 여러분, 직분은 우리를 구속하는 사슬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비천한 죄인의 자리에서 끌어올려,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검증의 과정을 통과하십시오. 삶의 일관성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끝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이 땅에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거룩한 담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분은 우리를 옭아매는 사슬이 아닙니다. 비천한 죄인인 우리를 끌어올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1) 직분은 명예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높이 올라갔느냐”를 묻지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나를 닮아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여러분의 명함에 새겨진 직함보다, 여러분의 인격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2) 직분은 짐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혹시 오늘 나열된 자격들 앞에서 ‘나는 가망이 없다’며 고개를 숙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직분자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입어기에 나도 기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3) 이제 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증명하십시오. 세상은 이제 우리의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의 ‘삶’을 읽습니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지위’를 증명하기 위해 어떤 위대한 일을 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대신 딱 한 가지,
• 내일 아침 출근하는 직장에서, 누군가 나를 비난할 때, 똑같이 갚아주지 않고 침묵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지위’를 지키는 집사님의 모습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읽을 것입니다.
• 가정에서 서로 발을 씻기는 여러분의 손길을 통해 자라나는 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배울 것입니다.
•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교회에서 따뜻한 미소와 함께 친절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의 넉넉함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복음의 비밀을 양심에 담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세상이 감당 못 할 ‘믿음의 큰 담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비추는 ‘아름다운 지위’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곧 지성소입니다. 여러분의 성품이 곧 복음의 전단지입니다. 이번 한 주간, 그리스도를 심장에 품고 말과 삶이 하나 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십시오. 장차 영광 가운데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참으로 아름다운 지위에 있었구나!”라는 주님의 자비로운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