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01.04.2026)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119회 작성일 Jan 05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1월 4일
본문: 미가 6:6-8
제목: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저마다의 소망을 품고, 또 결심을 합니다. “올해는 성경을 일독해야지.” “기도 시간을 늘려야지.” “예배에 결석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이 마음을 가지고 새해 첫 주일, 이 귀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 참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기 원합니다. 정말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일까요?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것일까요? 기도를 오래 하는 것입니까? 헌금과 봉사를 열심히 많이 하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신앙의 본질로 이끌어 갑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체면 때문에, 습관처럼 드리는 신앙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해 첫 주일, 우리는 다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질문에 답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교리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신앙의 ‘정답’을 정확히 아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른 교리는 중요합니다. 교리가 무너지면 신앙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신앙의 출발점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질문은 “이것을 지켜라”가 아니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였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를 하나님이 먼저 찾으신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관계가 없는 규칙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하신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갈지를 가르쳐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으로 부터 책망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구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밝았고, 종교적으로도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유대인들이 가진 열심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지 못한 열심이었습니다. 그 결과,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의 출발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아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신앙 (6-7절)
미가서 6장은 재판에서 변호사와 검사가 서로 주고 받으며 변론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서로 쟁론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제사 드리는 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이 무너진 것을 고발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따져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흡족하겠습니까?” (미 6:6-7)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여러분이 농부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1년 동안 정성껏 키워 정이 듬뿍 든 송아지를 바친다는 것은 대단한 희생입니다. 수천 마리의 양과 수만 배럴의 기름은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의 헌금입니다. 심지어 자식까지 바치겠다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정성의 끝판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바치면, 하나님도 내 죄를 못 본 척해주시겠지?”라는 계산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화 하나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친구와 함께 동업을 했습니다. 그를 믿고 재정을 맡겼는데 알고보니 몰래 돈을 횡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발각되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진심으로 뉘우치며 보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심 어린 사과 대신에, “자, 여기 돈 가져왔으니 이걸로 퉁 칩시다. 됐죠?”라고 한다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화가 더욱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밖에서는 약한 자를 속이고 불의를 행하면서, 성전 안에서는 “물 많이 가져왔으니 복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액수’가 아니라 그 제물을 가져온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 삶이 빠진 제사는 하나님께 기쁨이 아니라 고통일 뿐입니다.
물론 제사 제도를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사는 남아 있는데 관계가 사라졌고, 율법은 지키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제사 제도 자체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표지(sign)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순결한 짐승의 피라 한들 인간의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제사 제도는 오직 장차 오실 참된 제물, 곧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처음부터 ‘많은 양의 제사’가 아니라 언약에 합당한 마음이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 사랑이 삶으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만 이곳에 앉아 있고, 마음은 어제 본 드라마나 내일 있을 주식 시장, 사업 걱정에 가 계신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이나 ‘시간’ 그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사랑과 중심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세 가지 (8절)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은 그들이 특별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서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서로 사랑하며 도와주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서 모두 하나님이 주신 본복을 넘치도록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그 시대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나 민족들은 왕이나 귀족들, 아주 소수 권력층만을 위해 나머지 백성들이 죽도록 노동해야 하는 사회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왕이 되셔서 공의와 인애로 통치하며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각 지파별로 땅을 고루 분배해 주시고,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될 때, 그 사회는 공의와 자비가 사라집니다. 가진 자들은 더 탐욕을 부려 가난한 자들을 수탈하고, 재판관들은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약자를 억누르고,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보고도 책망하는 대신, 복을 빌어 줍니다. 결국 주전 722년에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짓밟히고, 남쪽 유대왕국마저 주전 586년에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을 불타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긴 죄로 인해 축복대신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미리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그들을 책망하며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들에게 멸망 대신 복을 누리며 영구히 사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8절 말씀은 성경 전체의 핵심을 요약한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율법의 요약이며, 동시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1)“공의를 행하며”
공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정직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대로 옳은 편에 서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땅히 걸어가야할 길을 제시합니다. 모호하지 않습니다. 어느 길이 복을 받는 길이고 어느 길이 저주의 길인지,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이고 어느 길이 멸망의 길인지를 확실하게 말씀해 줍니다. 혼동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옳은 일을 내가 행하느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죄성이 있어서 종종 의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옳은 일이 무엇이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행하기를 즐겨하지 않아요. 그래서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사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해 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내가 양심껏 잘 살아왔는데 왜 죄인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의로운 일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예수님은 공의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로 설명하셨습니다. 그 의는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의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공의는 힘 있는 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비록 내게 권세와 힘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정당하게 행사하여서 남에게 억울한 일을 행치 아니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나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부하 직원, 아르바이트생, 배달원 등)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겠다'는 결단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입니다.
2026년에 우리 모두 공의와 정의 편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를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인자를 사랑하며”
‘인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250번이 언급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언약적 사랑을 표현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 버리지 않는 사랑,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기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즉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자답게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 가족부터 시작해서 먼데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내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남편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에게 잘해 주는 성도 뿐만 아니라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십니까? 사랑의 특징에서 첫 번째 무엇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사랑은 ‘오래참고’입니다. 인내하면서 참아주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 날이 서 있습니다. 운전하다 조금만 늦어도 경적을 울리고,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혐오의 글들이 넘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친절’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하는 것은 세상 사람도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 말귀를 못 알아듣는 직장 동료, 무례하게 구는 교인에게 한 번 더 웃어주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사랑’입니다.
(골 3:13-14)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3)“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겸손이란 내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말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듣자 다윗의 형 엘리압은 화를 냈습니다.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 네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형 엘리압은 다윗이 교만하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자칫하면 엘리압처럼 되기 쉽습니다. 비굴을 겸손으로 가장하고, 교만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앞으로 나아간 것은 결코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열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기에 담대하게 나아간 것입니다.
믿음과 교만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교만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항상 내가 제일이고, 내가 인정 받아야 되고, 내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항상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나는 아무렇게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우선주의입니다.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겸손을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항상 함께 갑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립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길을 걸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3. 복 있는 사람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진짜 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그 자체가 복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어떤 자가 복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부름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공의를 행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사람은 “인자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집니다. 잘되기를 바랍니다. 축복해 줍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공의롭게 정직을 지킬 때,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손해 보며 사랑을 베풀 때, 그리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으며 겸손히 걸어갈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딸아, 내가 너로 인해 정말 기쁘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려면 먼저 우리의 내면세계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026년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 공의와 인자는 내 힘으로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주님의 손을 잡고 걸을 때, 주님의 성품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겸손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명하신 바대로 행하십시오. 2026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기시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2026년 1월 4일
본문: 미가 6:6-8
제목: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저마다의 소망을 품고, 또 결심을 합니다. “올해는 성경을 일독해야지.” “기도 시간을 늘려야지.” “예배에 결석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이 마음을 가지고 새해 첫 주일, 이 귀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 참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기 원합니다. 정말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배를 많이 드리는 것일까요? 교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것일까요? 기도를 오래 하는 것입니까? 헌금과 봉사를 열심히 많이 하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신앙의 본질로 이끌어 갑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체면 때문에, 습관처럼 드리는 신앙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해 첫 주일, 우리는 다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질문에 답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교리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신앙의 ‘정답’을 정확히 아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른 교리는 중요합니다. 교리가 무너지면 신앙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신앙의 출발점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질문은 “이것을 지켜라”가 아니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였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를 하나님이 먼저 찾으신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관계가 없는 규칙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하신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갈지를 가르쳐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으로 부터 책망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구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밝았고, 종교적으로도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 10:2)
유대인들이 가진 열심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지 못한 열심이었습니다. 그 결과,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의 출발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아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신앙 (6-7절)
미가서 6장은 재판에서 변호사와 검사가 서로 주고 받으며 변론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서로 쟁론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제사 드리는 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이 무너진 것을 고발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따져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흡족하겠습니까?” (미 6:6-7)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여러분이 농부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1년 동안 정성껏 키워 정이 듬뿍 든 송아지를 바친다는 것은 대단한 희생입니다. 수천 마리의 양과 수만 배럴의 기름은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의 헌금입니다. 심지어 자식까지 바치겠다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정성의 끝판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바치면, 하나님도 내 죄를 못 본 척해주시겠지?”라는 계산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화 하나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친구와 함께 동업을 했습니다. 그를 믿고 재정을 맡겼는데 알고보니 몰래 돈을 횡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발각되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진심으로 뉘우치며 보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심 어린 사과 대신에, “자, 여기 돈 가져왔으니 이걸로 퉁 칩시다. 됐죠?”라고 한다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화가 더욱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밖에서는 약한 자를 속이고 불의를 행하면서, 성전 안에서는 “물 많이 가져왔으니 복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액수’가 아니라 그 제물을 가져온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 삶이 빠진 제사는 하나님께 기쁨이 아니라 고통일 뿐입니다.
물론 제사 제도를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사는 남아 있는데 관계가 사라졌고, 율법은 지키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제사 제도 자체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표지(sign)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순결한 짐승의 피라 한들 인간의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제사 제도는 오직 장차 오실 참된 제물, 곧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처음부터 ‘많은 양의 제사’가 아니라 언약에 합당한 마음이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 사랑이 삶으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만 이곳에 앉아 있고, 마음은 어제 본 드라마나 내일 있을 주식 시장, 사업 걱정에 가 계신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이나 ‘시간’ 그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사랑과 중심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세 가지 (8절)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은 그들이 특별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을 사랑해서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서로 사랑하며 도와주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서 모두 하나님이 주신 본복을 넘치도록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그 시대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나 민족들은 왕이나 귀족들, 아주 소수 권력층만을 위해 나머지 백성들이 죽도록 노동해야 하는 사회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왕이 되셔서 공의와 인애로 통치하며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각 지파별로 땅을 고루 분배해 주시고,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될 때, 그 사회는 공의와 자비가 사라집니다. 가진 자들은 더 탐욕을 부려 가난한 자들을 수탈하고, 재판관들은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약자를 억누르고,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보고도 책망하는 대신, 복을 빌어 줍니다. 결국 주전 722년에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짓밟히고, 남쪽 유대왕국마저 주전 586년에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을 불타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긴 죄로 인해 축복대신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미리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그들을 책망하며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들에게 멸망 대신 복을 누리며 영구히 사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8절 말씀은 성경 전체의 핵심을 요약한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율법의 요약이며, 동시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1)“공의를 행하며”
공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닙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정직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대로 옳은 편에 서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땅히 걸어가야할 길을 제시합니다. 모호하지 않습니다. 어느 길이 복을 받는 길이고 어느 길이 저주의 길인지,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이고 어느 길이 멸망의 길인지를 확실하게 말씀해 줍니다. 혼동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옳은 일을 내가 행하느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죄성이 있어서 종종 의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옳은 일이 무엇이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행하기를 즐겨하지 않아요. 그래서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사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해 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내가 양심껏 잘 살아왔는데 왜 죄인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의로운 일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예수님은 공의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로 설명하셨습니다. 그 의는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의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공의는 힘 있는 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비록 내게 권세와 힘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정당하게 행사하여서 남에게 억울한 일을 행치 아니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나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부하 직원, 아르바이트생, 배달원 등)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겠다'는 결단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입니다.
2026년에 우리 모두 공의와 정의 편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를 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인자를 사랑하며”
‘인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250번이 언급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언약적 사랑을 표현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 버리지 않는 사랑,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기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입니다. 즉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자답게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 가족부터 시작해서 먼데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내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남편에게 어떤 태도로 대하십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에게 잘해 주는 성도 뿐만 아니라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십니까? 사랑의 특징에서 첫 번째 무엇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사랑은 ‘오래참고’입니다. 인내하면서 참아주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 날이 서 있습니다. 운전하다 조금만 늦어도 경적을 울리고,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혐오의 글들이 넘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친절’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하는 것은 세상 사람도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 말귀를 못 알아듣는 직장 동료, 무례하게 구는 교인에게 한 번 더 웃어주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사랑’입니다.
(골 3:13-14)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3)“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겸손이란 내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말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듣자 다윗의 형 엘리압은 화를 냈습니다.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 네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형 엘리압은 다윗이 교만하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자칫하면 엘리압처럼 되기 쉽습니다. 비굴을 겸손으로 가장하고, 교만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앞으로 나아간 것은 결코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열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기에 담대하게 나아간 것입니다.
믿음과 교만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교만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항상 내가 제일이고, 내가 인정 받아야 되고, 내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항상 먼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나는 아무렇게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우선주의입니다.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겸손을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항상 함께 갑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립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길을 걸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3. 복 있는 사람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진짜 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그 자체가 복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어떤 자가 복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부름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공의를 행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사람은 “인자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집니다. 잘되기를 바랍니다. 축복해 줍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공의롭게 정직을 지킬 때,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손해 보며 사랑을 베풀 때, 그리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으며 겸손히 걸어갈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딸아, 내가 너로 인해 정말 기쁘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려면 먼저 우리의 내면세계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026년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는 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 공의와 인자는 내 힘으로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주님의 손을 잡고 걸을 때, 주님의 성품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겸손히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명하신 바대로 행하십시오. 2026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기시기를 축원합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2Zy5qk9g7bg 52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