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11.1.2026)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11.1.2026)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2회 작성일 Nov 02 2026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11월 1일
본문:  요한계시록 16:1–21
제목: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 전 한국 방송에서 길거리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분은 80세가 된 노인이었습니다.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면서 매달 받는 연금 대신 퇴직금을 일시 불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주식에 투자하다가 그 돈을 모두 잃었고, 결국 살던 아파트마저 잃었습니다. 그 후 아내는 집을 떠났고, 그는 10년째 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인터뷰하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르신, 소원이 있으십니까?” 그분의 대답이 참 마음 아팠습니다. “내가 잠잘 때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여러분,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면 남은 인생의 소원이 조용히 죽는 것이었을까요?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소원합니다. 젊을 때는 성공을 꿈꾸고, 나이가 들면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삶이 너무 고달파서 죽음이 모든 고통의 끝이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정말 모든 것의 끝일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는 자신의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이 언제인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개인의 죽음뿐 아니라 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그 마지막을 보여 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여러분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무서운 재앙과 전쟁, 적그리스도와 마지막 심판을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전쟁과 재난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사탄은 이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신 목적이 우리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무서운 재앙만 보여 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어린양이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두려운 세상에서도 믿음과 담대함과 소망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 요한계시록 15장에서 우리는 유리 바닷가에 선 성도들이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6장에서는 그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대접 심판을 행하십니다. 바다가 피처럼 되고, 해가 사람들을 태우며,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집니다. 마지막에는 큰 지진과 엄청난 우박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재앙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비방합니다. 더욱이 사탄은 온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렇다면 연약한 우리는 어떻게 그 미혹을 이기고 마지막 날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때, 세상을 미혹하는 악한 영들의 소리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이 말씀이 왜 두려움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이 되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심판보다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1–11절)

첫째 대접이 쏟아지자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한 사람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생깁니다. 둘째 대접에서는 바다가 피처럼 되고, 셋째 대접에서는 강과 물 근원도 피가 됩니다.

이때 물을 차지한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기에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어 7절에서는 제단에서 음성이 나옵니다.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제단 아래 순교자들은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자신들의 신원을 풀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제단에서 들리는 찬양은 그 기도에 호응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흘린 피를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성도들의 억울한 눈물을 잊어버린 듯해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정하신 때에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무서운 재앙이 아닙니다. 악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의 억울함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이 장면은 애굽의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이 피가 되고, 종기와 어둠과 우박이 임했습니다. 바로는 재앙이 닥치면 다급하게 모세를 불러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멎으면 다시 이스라엘을 붙잡아 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내려면 자신이 쥐고 있던 권력과 지배력을 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재앙이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왕좌에서는 내려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기는 싫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모습을 봅니다. 9절에서 넷째 대접이 쏟아지자 사람들이 심한 열기에 태워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하기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합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은 너무 고통스러워 자기 혀를 깨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죄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단지 바로나 마지막 심판을 받는 사람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도 닮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가령 가족에게 화를 내며 상처 주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잘못한 줄 압니다. 사과하려고 방문 앞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립니다. “내가 먼저 사과하면 우습게 보지 않을까?” 그렇게 하루를 넘깁니다. 며칠 뒤에는 변명이 생깁니다. “그 사람도 잘못했잖아. 왜 나만 사과해야 하지?” 처음에는 잘못을 알았지만, 이제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는 일이 옳은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과를 미루는 잘못과 하나님을 끝까지 대적하는 반역은 그 심각성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뿌리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려는 죄의 마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은 사람이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붙잡고 싶은 체면과 인정, 돈과 안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상실할까봐 두려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미루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 굳게 결심하면 해결되겠습니까? 물론 결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마음은 결심만으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에스겔 36장에서 하나님은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굳게 닫힌 마음을 여시고 죄를 인정하게 하시는 분,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변명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인정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심판받는 사람들은 짐승을 숭배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는 성도는 그들과 다릅니다. 자신의 죄를 아파하고 있다면 그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욕망은 사탄의 미혹이 파고드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손해 보기 싫고, 인정받고 싶고,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사탄은 바로 그 마음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여섯째 대접은 이러한 미혹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 줍니다.

2. 미혹이 세상을 사로잡을 때 주님의 음성이 자기 백성을 깨웁니다 (12–16절)

여섯째 대접이 유브라데 강에 쏟아지자 강물이 마르고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준비됩니다. 이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나옵니다. 그 영들은 이적을 행하며 온 세상의 왕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으로 모읍니다. 16절은 그들이 아마겟돈에 모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마겟돈이 오늘날 어느 나라의 어느 지역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아마겟돈을 오늘의 특정 국가나 전쟁에 곧바로 연결할 근거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탄이 어떻게 온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만드는지를 보여 줍니다.

개구리 같은 영들은 애굽의 개구리 재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애굽의 요술사들도 이적을 흉내 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더러운 영들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의 미혹은 거짓된 말과 속임수를 통해 퍼져 갑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했던 것처럼 오늘도 속삭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본다. 이번만 타협하라.”

사탄의 거짓말이 통하는 것은 우리 안에도 손해 보기 싫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 욕망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앞세우도록 유혹합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다른 제자들이 모두 주님을 버려도 자신은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확신했던 베드로도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도 전쟁과 재난의 소식을 들을 때 불안해합니다. 경제가 흔들리면 미래가 걱정되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두려워집니다. 이러한 두려움 자체가 모두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위험을 더 크게 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세상의 힘과 안전을 붙잡도록 유혹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혹 속에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놀랍게도 오늘 본문은 사탄의 활동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14절에서는 악한 영들이 온 세상의 왕들을 하나님께 대항하는 전쟁으로 모읍니다. 16절에서는 그들이 아마겟돈에 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이에 15절이 있습니다.

악한 영들의 소리가 온 세상을 뒤덮는 듯한 그때, 전혀 다른 음성이 들려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 누가 말씀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온 세상을 미혹하고, 세상의 왕들은 하나님께 대항하기 위해 모여듭니다. 악의 세력이 모든 것을 장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이 말씀이 왜 우리에게 소망입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이 세상이 결코 사탄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하나님께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의 마지막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결정하실 분은 사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위로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시 오신다는 약속과 함께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아는 것보다 그날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자기 백성에게 소망이지만, 동시에 깨어 준비하라는 엄숙한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혼란을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말씀하시면서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24:6). 환난은 실제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환난이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수는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18절은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경고하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은 주께서 불법한 자를 멸하실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미혹을 경계하지만 악의 세력을 주님보다 크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둑같이 오리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오실 때를 우리가 미리 계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성도에게 그날은 준비 없이 덮치는 날이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살전 5:4). 날짜를 알아서가 아니라 빛 가운데 주님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깨어 자기 옷을 지키라.” 이 말씀은 교회에 낯선 경고가 아닙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에도 깨어 있지 않으면 도둑같이 이르겠다고 하셨고(계 3:3),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도록 흰옷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계 3:18). 세상의 징조만 살피지 말고 우리 자신의 믿음과 삶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옷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옷은 어디에서 얻은 것입니까? 우리의 선한 행위로 만들어 낸 옷입니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은 하나님 앞에 선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 때문입니다.

7장의 흰옷은 어린양의 피로 얻은 정결함을 보여 줍니다. 16장의 “옷을 지키라”는 말씀은 그 은혜를 받은 성도가 믿음과 거룩함을 지키며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구원을 귀하게 여기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말씀에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충성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주님께 충성합니다.

앞에서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넘어지기 전에 이미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세 번 부인했던 그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다시 양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를 일으킨 것은 그의 굳센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자신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분도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는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강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다 알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징조를 헤아리느라 오늘 해야 할 순종을 미루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해야 할 말을 삼키고 있습니까? 자녀와 손주의 앞날이 걱정되어 돈과 성공만 붙들고 있습니까? 건강검진 결과를 기다리거나 노후의 생활비를 계산하면서 주님의 약속보다 불안한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깨어 있는 믿음은 바로 이런 날에 드러납니다. 가족에게 사과할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마십시오. 손해가 두려워도 정직하게 선택하십시오. 염려가 밀려올 때 기도하며 주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주어진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나 순종한다고 고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삶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지막 일곱째 대접이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3. 우리가 끝까지 깨어 있을 이유는 마지막 말씀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17–21절)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자 성전의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되었다.”

마지막 대접 심판의 완결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이어지는 장면이 그 선언의 무게를 보여 줍니다. 땅이 흔들리고 성들이 무너집니다. 큰 바벨론도 심판을 받습니다. 바벨론은 부와 권세로 사람을 유혹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세상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영원할 듯 높이 선 성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떨게 하던 권세도 심판 앞에 쓰러집니다.

21절에서는 수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우박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릎을 꿇기는커녕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9절에서도 비방했고, 11절에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대지에서 본 완악함이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그들의 비방으로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보좌에서 나온 선언을 되돌릴 수 있을까요?
“되었다.”

사탄도, 적그리스도도,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마지막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앞서 5–7절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흘린 피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19절은 큰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심판받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성도들의 고난을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악이 마지막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마지막에 의롭게 판단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들렸던 또 하나의 선언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음을 알립니다. 오늘 본문의 “되었다”는 선언은 마지막 대접 심판의 완결을 알립니다. 두 선언은 서로 다른 사건을 가리키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분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졌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이 부활하셔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악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을 두려움만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심판이 가볍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혼란이나 사탄의 승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일 어떤 소식이 들릴지는 모릅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도 예상하지 못한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씀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압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오늘도 주님께 충성하십시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에 말씀드린 80세 노인을 기억하십니까? 평생 모은 재산을 잃고 홀로 살아가던 그분은 잠든 사이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소원을 품었을까요?

그러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 우리의 재산도, 선행도, 오랜 신앙생활도 우리의 죄를 씻어 주지 못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달았다면 오늘 주님께 돌아오십시오. 믿음이 약해졌다면 자신의 결심보다 주님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두려움 때문에 순종을 미루고 있다면 오늘 말씀을 따라 한 걸음 내디디십시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은 바로 오늘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사탄은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떠나도록 미혹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두려움보다 더 큰 소망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어린양이 이미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미혹하지만,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붙드십니다. 세상의 권세는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미혹하는 소리 한가운데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선언하십니다. “되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세상이 얼마나 더 흔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누가 오시는지는 압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보다 주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승리하신 어린양을 바라보며 오늘도 깨어 충성하십시오. 우리를 붙드시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아멘.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