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바다에 서서 부르는 어린양의 노래 (10.25.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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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0회 작성일 Oct 26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10월 25일
본문: 요한계시록 15:1–8
제목: 유리 바다에 서서 부르는 어린양의 노래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이 참으로 불합리하다, 인생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가 하면 정직한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봅니다. 오랫동안 기도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억울한 일이 끝내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지요. 그럴 때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 모든 일을 보고 계시는가? 그렇다면 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까?”
그런데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15장에는 뜻밖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일곱 천사가 마지막 재앙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재앙이 쏟아지기 전에 먼저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승리의 노래입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나타나고, 그 바닷가에 한 무리가 서 있습니다. 짐승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 노래의 내용이 놀랍습니다. 자신들이 겪은 고난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자신들을 핍박했던 사람들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찬양할 뿐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이 승리의 노래를 먼저 들려주셨을까요? 마지막 심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어린양의 구원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이 참된 승리자입니다 (2–3절)
먼저 2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 권세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핍박을 겪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패배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승리자로 보여 주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끝까지 어린양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세상은 상대를 죽이면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은 다릅니다.
죽어도 어린양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이긴 사람입니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가 그 승리의 근거였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삶은 그 승리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힘이 있고 성공한 사람을 승리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승리자는 어린양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자들이 서 있는 곳을 보십시오.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입니다. 유리 바다는 이미 요한계시록 4장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그 바닷가에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이 서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불이 섞인 모습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지막 심판을 앞둔 장면의 엄숙함을 느끼게 하지요.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모세의 노래라고 하니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바로의 군대에 쫓기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제 요한은 유리 바닷가에서 노래하는 또 다른 무리를 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바로의 권세에서 구원받았다면,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죄와 사탄과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두 장면은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하나의 모세의 노래가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입니다. 모세는 그 노래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신 32:4)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가 함께 찬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과 공의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기억해 보십시오. 요한은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기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죽임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죽임당한 모습이 패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바로 그 어린양이 승리자이십니다.
그분은 죽임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셨고, 이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유리 바닷가에 선 성도들의 승리는 어린양의 승리에 근거합니다.
그들이 노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강하고 용감했는지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2. 승리한 성도들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4절)
이제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어서 4절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하다고 하실 수 없고, 불의를 의롭다고 인정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된 분노와 다릅니다. 악에 대한 거룩하고 의로운 반응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기록된 나봇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기업을 팔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 나봇을 죽게 했고, 아합은 마침내 그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힘 있는 왕은 원하는 것을 얻었고, 힘없는 나봇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끝난 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왕상 21:19)
사람들이 침묵한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침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권력자가 자기 뜻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판결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낮추자, 하나님께서는 선언하신 재앙을 그의 생전에는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반드시 심판하셔야 한다면, 그 심판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합처럼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빼앗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삶에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가 없습니까? 다른 사람의 거짓말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거짓말에는 관대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교만은 쉽게 발견하면서 자신의 교만은 정당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이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는 우리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린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죄인들을 버려두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서 우리는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을 봅니다.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이 서로 싸우는 곳이 아니라 함께 드러나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절에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본래 의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리 바닷가의 성도들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본래 의로워서 심판을 면한 사람들의 노래가 아닙니다. 심판받아 마땅했으나 어린양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찬양에는 다른 사람의 멸망을 즐기는 마음이나 자기 의로움에 대한 자랑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경외가 있어야 하며,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움도 있어야 합니다.
4절 마지막에서 성도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운 통치는 마침내 모든 민족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지막 일곱 재앙이 쏟아지는 장면을 보여 주기 전에 먼저 이 찬양을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는 노래입니다.
이제 그 찬양이 마지막 심판의 장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3.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드러냅니다 (1, 5–8절)
1절에서 요한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를 보았습니다.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그런데 2–4절에서는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5절부터 다시 일곱 천사가 등장합니다. 마지막 재앙을 알리는 장면 사이에 승리한 성도들의 찬양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 줍니까? 마지막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찬양을 통해 들려주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여기서 증거 장막은 구약의 성막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을 증언하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증거 장막이 열리는 장면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신실하심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내리시는 판결이 아닙니다. 오래 참으시고 경고하셨으며, 말씀하신 대로 의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제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네 생물 중 하나가 천사들에게 하나
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줍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기억하십니까?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이 언제 바로잡힐 것인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이제 하늘 성전에서 마지막 심판이 준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난과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8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 장면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과 성전에 충만했던 구약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영광 앞에서는 누구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엄숙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악을 영원히 방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9장에서는 재앙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16장에서도 하나님을 비방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마침내 악을 심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형통하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일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바로잡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 왜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마지막 판결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이 시작되면 엄중하게, 정확하게, 빈틈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태워질 것입니다.
요한은 마지막 재앙에 앞서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양합니다.
이 찬양은 아직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믿음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기에 악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신실하시기에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님의 마지막 판결이 드러나지 않은 세상에서도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신뢰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리 바닷가에 선 성도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 이 고백이 선뜻 나오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의 모든 길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믿음의 삶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 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가 바라볼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을 보여 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아직 유리 바닷가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부를 노래를 오늘의 삶 속에서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도 모든 성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온전한 기쁨으로 노래하겠지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날짜: 2026년 10월 25일
본문: 요한계시록 15:1–8
제목: 유리 바다에 서서 부르는 어린양의 노래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이 참으로 불합리하다, 인생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가 하면 정직한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봅니다. 오랫동안 기도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억울한 일이 끝내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지요. 그럴 때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 모든 일을 보고 계시는가? 그렇다면 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까?”
그런데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15장에는 뜻밖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일곱 천사가 마지막 재앙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재앙이 쏟아지기 전에 먼저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승리의 노래입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나타나고, 그 바닷가에 한 무리가 서 있습니다. 짐승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 노래의 내용이 놀랍습니다. 자신들이 겪은 고난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자신들을 핍박했던 사람들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찬양할 뿐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이 승리의 노래를 먼저 들려주셨을까요? 마지막 심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어린양의 구원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이 참된 승리자입니다 (2–3절)
먼저 2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 권세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핍박을 겪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패배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승리자로 보여 주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끝까지 어린양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세상은 상대를 죽이면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은 다릅니다.
죽어도 어린양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이긴 사람입니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가 그 승리의 근거였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삶은 그 승리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힘이 있고 성공한 사람을 승리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승리자는 어린양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자들이 서 있는 곳을 보십시오. 불이 섞인 유리 바닷가입니다. 유리 바다는 이미 요한계시록 4장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그 바닷가에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이 서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불이 섞인 모습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지막 심판을 앞둔 장면의 엄숙함을 느끼게 하지요.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모세의 노래라고 하니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바로의 군대에 쫓기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제 요한은 유리 바닷가에서 노래하는 또 다른 무리를 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바로의 권세에서 구원받았다면,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죄와 사탄과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두 장면은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또 하나의 모세의 노래가 있습니다. 신명기 32장입니다. 모세는 그 노래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신 32:4)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가 함께 찬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과 공의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기억해 보십시오. 요한은 유다 지파의 사자가 이기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죽임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죽임당한 모습이 패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바로 그 어린양이 승리자이십니다.
그분은 죽임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셨고, 이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유리 바닷가에 선 성도들의 승리는 어린양의 승리에 근거합니다.
그들이 노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강하고 용감했는지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2. 승리한 성도들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4절)
이제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어서 4절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하다고 하실 수 없고, 불의를 의롭다고 인정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된 분노와 다릅니다. 악에 대한 거룩하고 의로운 반응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기록된 나봇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기업을 팔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 나봇을 죽게 했고, 아합은 마침내 그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힘 있는 왕은 원하는 것을 얻었고, 힘없는 나봇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끝난 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 아합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왕상 21:19)
사람들이 침묵한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침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권력자가 자기 뜻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판결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낮추자, 하나님께서는 선언하신 재앙을 그의 생전에는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을 반드시 심판하셔야 한다면, 그 심판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합처럼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빼앗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삶에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가 없습니까? 다른 사람의 거짓말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거짓말에는 관대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교만은 쉽게 발견하면서 자신의 교만은 정당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이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는 우리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어린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죄인들을 버려두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서 우리는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을 봅니다.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이 서로 싸우는 곳이 아니라 함께 드러나는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1절에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본래 의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리 바닷가의 성도들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본래 의로워서 심판을 면한 사람들의 노래가 아닙니다. 심판받아 마땅했으나 어린양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찬양에는 다른 사람의 멸망을 즐기는 마음이나 자기 의로움에 대한 자랑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경외가 있어야 하며,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움도 있어야 합니다.
4절 마지막에서 성도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운 통치는 마침내 모든 민족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마지막 일곱 재앙이 쏟아지는 장면을 보여 주기 전에 먼저 이 찬양을 들려줍니다.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는 노래입니다.
이제 그 찬양이 마지막 심판의 장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3.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드러냅니다 (1, 5–8절)
1절에서 요한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를 보았습니다.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그런데 2–4절에서는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5절부터 다시 일곱 천사가 등장합니다. 마지막 재앙을 알리는 장면 사이에 승리한 성도들의 찬양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 줍니까? 마지막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찬양을 통해 들려주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여기서 증거 장막은 구약의 성막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을 증언하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증거 장막이 열리는 장면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신실하심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내리시는 판결이 아닙니다. 오래 참으시고 경고하셨으며, 말씀하신 대로 의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제 일곱 천사가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네 생물 중 하나가 천사들에게 하나
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줍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기억하십니까?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이 언제 바로잡힐 것인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이제 하늘 성전에서 마지막 심판이 준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난과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8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 장면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과 성전에 충만했던 구약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영광 앞에서는 누구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엄숙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고 해서 악을 영원히 방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9장에서는 재앙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16장에서도 하나님을 비방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마침내 악을 심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형통하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일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바로잡을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 왜 가만히 계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마지막 판결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이 시작되면 엄중하게, 정확하게, 빈틈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태워질 것입니다.
요한은 마지막 재앙에 앞서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양합니다.
이 찬양은 아직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믿음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거룩하시기에 악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신실하시기에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님의 마지막 판결이 드러나지 않은 세상에서도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신뢰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리 바닷가에 선 성도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 이 고백이 선뜻 나오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의 모든 길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믿음의 삶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 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가 바라볼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을 보여 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아직 유리 바닷가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부를 노래를 오늘의 삶 속에서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도 모든 성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더 이상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온전한 기쁨으로 노래하겠지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