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회개치 아니하더라 (09.13.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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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8회 작성일 Sep 14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9월 13일
본문: 요한계시록 9:1–21
제목: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더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고난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이지요. 욥의 삶은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재산이 사라지고, 자녀들이 죽고, 몸에는 악창이 돋았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읽는 우리는 욥이 보지 못하는 한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바로 하늘입니다.
욥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잿더미에 앉아 묻습니다. “왜입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까?”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자 우리는 이제 모든 이유를 설명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의 원인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를 거대한 창조세계 앞에 세우시며 물으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은 모든 이유를 알게 되어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해하는 세계보다 하나님의 세계가 훨씬 크다는 사실 앞에서 자기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한 다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남겨 둔 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를 만납니다. 이 책을 처음 받아 읽었던 교회 역시 고난받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강했고 교회는 약했습니다. 황제의 권력은 눈에 보였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믿음 때문에 삶의 자리를 잃고 어떤 이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도 이런 질문이 있었겠지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악은 왜 이렇게 강한가? 우리가 어린양을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 역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의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늘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땅에는 고난받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 앞에는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이 서 계시고, 역사의 두루마리는 그 어린양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땅만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땅만 보면 로마가 이기는 것 같습니다. 악이 강하고 교회가 패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늘이 열리면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실재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보좌에 앉아 계시고 어린양께서는 역사의 두루마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역사는 주인을 잃고 표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흔들어 인간을 깨우시면 사람들이 돌아올까요? 죽음을 가까이 보고, 자신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 마침내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요?
요한계시록 9장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9장에서 정말 두려운 것은 황충이나 이만만의 마병대만이 아닙니다. 그 모든 심판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 바로 그것입니다.
1. 무저갱이 열려도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십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무저갱이 열리고 검은 연기가 올라옵니다. 그 연기 가운데서 황충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전쟁을 준비한 말 같고 사자의 이빨을 가졌으며, 날개 소리는 전쟁터로 달려가는 병거 소리와 같습니다. 그들이 가져오는 고통은 얼마나 처절한지 사람들이 죽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죽음조차 그들을 피해 갑니다.
그 황충들에게는 왕이 있습니다. ‘무저갱의 사자’, 그 이름은 아바돈, 아볼루온, 곧 “파괴자”입니다. 이 이름이 악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악은 처음부터 파괴자의 얼굴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작은 타협처럼 찾아옵니다. 때로는 나를 만족시키고 자유롭게 해 줄 것처럼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마침내 어떻게 됩니까? 그 죄가 나를 붙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의 마지막 방향은 생명이 아닙니다. 파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파괴자”조차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저갱의 열쇠를 보십시오. 그가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입니다. 황충의 권세도 주어졌습니다. 해칠 대상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활동할 기간마저 정해져 있습니다. 악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무한하지 않습니다. 악은 활동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지휘하지는 못합니다.
파괴자는 역사의 왕은 아닙니다. 무저갱이 열려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황충이 올라와도 어린양은 역사의 두루마리를 손에서 놓지 않으십니다. 악은 날뛰어도 하나님의 통치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고난받는 교회가 붙들어야 할 진실입니다. 우리에게도 땅만 보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병원에서 의사의 말을 듣고 나오면 그 진단이 내 인생의 마지막 말처럼 들립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일이 내 삶 전체를 삼킨 것 같습니다. 평생 함께 살던 사람이 먼저 떠나면 세상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때 계시록은 모든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 땅만 내려다보던 우리의 얼굴을 들어 올립니다.
“보좌를 바라보아라.”
거기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지금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물론 이것이 성도에게 고난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성도들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침은 그것보다 더 깊은 진실을 선언합니다.
고난도 죽음도 어린양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담대함은 “앞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나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어린양께 속해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다 아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그런데 나팔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더 무거운 질문이 우리 앞에 놓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세상을 흔드시면, 인간은 과연 하나님께 돌아올까요?
2.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재앙은 더 깊어집니다. 네 천사가 풀려나고 이만만, 곧 이억의 마병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장면 한가운데 15절을 보십시오.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역사가 통제 불능 상태로 폭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시간까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더구나 나팔 심판에서는 “삼분의 일”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아직 전부를 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마지막 심판도 아닙니다. 왜 남겨 두셨을까요? 돌아올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멈추어라. 깨어나라. 돌아오라.”
사람들은 건강과 돈과 자녀와 내일을 붙들며 살아갑니다. 마치 그것들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붙들고 있던 것이 흔들릴 때 비로소 그것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붙들고 있던 그것이 정말 너를 살릴 수 있느냐?”
우리는 큰 고통을 겪으면 사람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가까이 대하면 겸손해지고, 인생이 크게 흔들리면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요한계시록 9장은 인간에 관하여 훨씬 불편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죽을 만큼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내가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자체가 새로운 마음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울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살려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도움만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요? 병은 고쳐 주십시오. 자녀는 지켜 주십시오. 형편은 풀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가 주인 되어 살던 자리에서 내려오너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바로 그때 우리 마음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원하면서도 내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기는 원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깊어진다고 인간의 마음이 저절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두려운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이렇게까지 세상이 흔들렸는데,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께 돌아왔을까요?
요한계시록 9장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치 않았습니다.”
3.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치 않았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21절은 다시 선언합니다.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회개치 아니하더라.
이 말씀 앞에서는 쉽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 왜 전쟁과 재난이 그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점점 악해지는가? 그런데 요한계시록 9장의 마지막 두 절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로 말입니다.
“네 마음을 보아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경고를 듣고도 자신의 길을 고집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대면해 봅시다. 교회는 오래 다녀도 내 마음의 왕좌는 여전히 내가 차지하고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20절과 21절을 자세히 보면 인간의 죄를 말하는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우상숭배가 나오고 그 뒤에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이 이어집니다. 왜 우상숭배가 먼저 나오는 것일까요?
우상숭배는 단순히 어떤 형상 앞에 절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깊은 신뢰와 사랑을 하나님 아닌 것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나는 살 수 있다. 이것이 나를 안전하게 해 준다.” 그렇게 붙드는 순간 그것은 어느새 내 마음의 왕좌에 앉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의 문제입니다. 내가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주인이 되면 사람을 억누릅니다. 욕망이 주인이 되면 사람을 이용합니다. 돈이 주인이 되면 사람의 가치까지 돈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배가 무너지고, 그다음 삶이 무너집니다. 무엇을 예배하느냐가 결국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왕좌에는 무엇이 앉아 있을까요? 우리 이민 1세대는 “내 자식만큼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평생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귀한 사랑이지요. 그러나 “자녀가 잘되었으면 좋겠다”가 어느 순간 “자녀가 잘되어야 내 인생이 성공한 것이다”로 바뀐다면 어떻습니까? 사랑의 대상이던 자녀가 내 인생의 의미를 떠받치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노후를 위한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 그렇게 믿기 시작하는 순간 돈은 더 이상 통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새 마음의 왕좌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생활 한 사람에게는 더 알아보기 어려운 우상이 하나 있습니다. 내 경험과 내 생각입니다. “내가 살아 봐서 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왔다.” 그 말 속에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들으며 “내가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 사람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칼날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향하고 나에게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심사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몸은 늙습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과 함께 마음까지 굳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때는 말씀 앞에서 잘못을 깨달으면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돌이킬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주님,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평생 옳다고 생각했던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에도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인정하며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더 깊은 문제와 마주칩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굳어 있다면, 도대체 누가 그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9장의 사람들은 죽음을 찾을 만큼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판은 인간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새롭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회개할 힘조차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해답이 무엇입니까?
어린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부터 고쳐 놓고 내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어린양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동시에 그렇게 완악한 죄인을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사랑하셨는지도 보여 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힘으로 굳은 마음을 고칠 수 있었다면 십자가가 왜 필요했겠습니까?
복음은 먼저 자신을 고쳐 놓고 오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달라질 수 없는 내가 빈손으로 어린양께 돌아가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주님, 제가 틀렸습니다. 제가 붙들었던 것이 저를 살릴 수 없습니다.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맺는말
우리는 처음에 물었습니다. “이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런데 요한계시록 9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질문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세상이 완악하다고 말하기 전에 내 마음부터 보십시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데도 내가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의 왕좌에는 지금 누가 앉아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9장의 마지막 말은 두렵습니다.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더라.”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뒤에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에는 하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어린양께서 역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내 마음의 왕좌에서 내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합니다. 내가 왕이었던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주님, 내가 돌아갑니다.”
날짜: 2026년 9월 13일
본문: 요한계시록 9:1–21
제목: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더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고난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이지요. 욥의 삶은 하루아침에 무너졌습니다. 재산이 사라지고, 자녀들이 죽고, 몸에는 악창이 돋았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읽는 우리는 욥이 보지 못하는 한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바로 하늘입니다.
욥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잿더미에 앉아 묻습니다. “왜입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까?”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자 우리는 이제 모든 이유를 설명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의 원인을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를 거대한 창조세계 앞에 세우시며 물으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은 모든 이유를 알게 되어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해하는 세계보다 하나님의 세계가 훨씬 크다는 사실 앞에서 자기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한 다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남겨 둔 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를 만납니다. 이 책을 처음 받아 읽었던 교회 역시 고난받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강했고 교회는 약했습니다. 황제의 권력은 눈에 보였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믿음 때문에 삶의 자리를 잃고 어떤 이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도 이런 질문이 있었겠지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악은 왜 이렇게 강한가? 우리가 어린양을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 역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의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늘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땅에는 고난받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 앞에는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이 서 계시고, 역사의 두루마리는 그 어린양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땅만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땅만 보면 로마가 이기는 것 같습니다. 악이 강하고 교회가 패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늘이 열리면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실재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보좌에 앉아 계시고 어린양께서는 역사의 두루마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역사는 주인을 잃고 표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흔들어 인간을 깨우시면 사람들이 돌아올까요? 죽음을 가까이 보고, 자신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 마침내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요?
요한계시록 9장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9장에서 정말 두려운 것은 황충이나 이만만의 마병대만이 아닙니다. 그 모든 심판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 바로 그것입니다.
1. 무저갱이 열려도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십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무저갱이 열리고 검은 연기가 올라옵니다. 그 연기 가운데서 황충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전쟁을 준비한 말 같고 사자의 이빨을 가졌으며, 날개 소리는 전쟁터로 달려가는 병거 소리와 같습니다. 그들이 가져오는 고통은 얼마나 처절한지 사람들이 죽기를 구합니다. 그런데 죽음조차 그들을 피해 갑니다.
그 황충들에게는 왕이 있습니다. ‘무저갱의 사자’, 그 이름은 아바돈, 아볼루온, 곧 “파괴자”입니다. 이 이름이 악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악은 처음부터 파괴자의 얼굴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작은 타협처럼 찾아옵니다. 때로는 나를 만족시키고 자유롭게 해 줄 것처럼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마침내 어떻게 됩니까? 그 죄가 나를 붙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악의 마지막 방향은 생명이 아닙니다. 파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파괴자”조차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저갱의 열쇠를 보십시오. 그가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입니다. 황충의 권세도 주어졌습니다. 해칠 대상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활동할 기간마저 정해져 있습니다. 악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무한하지 않습니다. 악은 활동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지휘하지는 못합니다.
파괴자는 역사의 왕은 아닙니다. 무저갱이 열려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황충이 올라와도 어린양은 역사의 두루마리를 손에서 놓지 않으십니다. 악은 날뛰어도 하나님의 통치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고난받는 교회가 붙들어야 할 진실입니다. 우리에게도 땅만 보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병원에서 의사의 말을 듣고 나오면 그 진단이 내 인생의 마지막 말처럼 들립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일이 내 삶 전체를 삼킨 것 같습니다. 평생 함께 살던 사람이 먼저 떠나면 세상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때 계시록은 모든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 땅만 내려다보던 우리의 얼굴을 들어 올립니다.
“보좌를 바라보아라.”
거기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지금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물론 이것이 성도에게 고난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성도들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침은 그것보다 더 깊은 진실을 선언합니다.
고난도 죽음도 어린양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담대함은 “앞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나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어린양께 속해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다 아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그런데 나팔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더 무거운 질문이 우리 앞에 놓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세상을 흔드시면, 인간은 과연 하나님께 돌아올까요?
2. 하나님께서는 심판 가운데서도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재앙은 더 깊어집니다. 네 천사가 풀려나고 이만만, 곧 이억의 마병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장면 한가운데 15절을 보십시오.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역사가 통제 불능 상태로 폭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시간까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더구나 나팔 심판에서는 “삼분의 일”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아직 전부를 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마지막 심판도 아닙니다. 왜 남겨 두셨을까요? 돌아올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멈추어라. 깨어나라. 돌아오라.”
사람들은 건강과 돈과 자녀와 내일을 붙들며 살아갑니다. 마치 그것들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붙들고 있던 것이 흔들릴 때 비로소 그것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붙들고 있던 그것이 정말 너를 살릴 수 있느냐?”
우리는 큰 고통을 겪으면 사람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가까이 대하면 겸손해지고, 인생이 크게 흔들리면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요한계시록 9장은 인간에 관하여 훨씬 불편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죽을 만큼 아프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내가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자체가 새로운 마음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울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살려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도움만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요? 병은 고쳐 주십시오. 자녀는 지켜 주십시오. 형편은 풀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가 주인 되어 살던 자리에서 내려오너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바로 그때 우리 마음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원하면서도 내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기는 원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깊어진다고 인간의 마음이 저절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두려운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이렇게까지 세상이 흔들렸는데,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께 돌아왔을까요?
요한계시록 9장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치 않았습니다.”
3.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치 않았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21절은 다시 선언합니다.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회개치 아니하더라.
이 말씀 앞에서는 쉽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 왜 전쟁과 재난이 그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점점 악해지는가? 그런데 요한계시록 9장의 마지막 두 절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로 말입니다.
“네 마음을 보아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경고를 듣고도 자신의 길을 고집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대면해 봅시다. 교회는 오래 다녀도 내 마음의 왕좌는 여전히 내가 차지하고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20절과 21절을 자세히 보면 인간의 죄를 말하는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우상숭배가 나오고 그 뒤에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이 이어집니다. 왜 우상숭배가 먼저 나오는 것일까요?
우상숭배는 단순히 어떤 형상 앞에 절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깊은 신뢰와 사랑을 하나님 아닌 것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나는 살 수 있다. 이것이 나를 안전하게 해 준다.” 그렇게 붙드는 순간 그것은 어느새 내 마음의 왕좌에 앉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의 문제입니다. 내가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주인이 되면 사람을 억누릅니다. 욕망이 주인이 되면 사람을 이용합니다. 돈이 주인이 되면 사람의 가치까지 돈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배가 무너지고, 그다음 삶이 무너집니다. 무엇을 예배하느냐가 결국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왕좌에는 무엇이 앉아 있을까요? 우리 이민 1세대는 “내 자식만큼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평생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귀한 사랑이지요. 그러나 “자녀가 잘되었으면 좋겠다”가 어느 순간 “자녀가 잘되어야 내 인생이 성공한 것이다”로 바뀐다면 어떻습니까? 사랑의 대상이던 자녀가 내 인생의 의미를 떠받치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노후를 위한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안전하다.” 그렇게 믿기 시작하는 순간 돈은 더 이상 통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새 마음의 왕좌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오래 신앙생활 한 사람에게는 더 알아보기 어려운 우상이 하나 있습니다. 내 경험과 내 생각입니다. “내가 살아 봐서 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왔다.” 그 말 속에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들으며 “내가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 사람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칼날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향하고 나에게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심사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몸은 늙습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과 함께 마음까지 굳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때는 말씀 앞에서 잘못을 깨달으면 돌이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돌이킬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주님,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평생 옳다고 생각했던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에도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인정하며 돌아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더 깊은 문제와 마주칩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굳어 있다면, 도대체 누가 그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9장의 사람들은 죽음을 찾을 만큼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판은 인간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새롭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회개할 힘조차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해답이 무엇입니까?
어린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부터 고쳐 놓고 내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어린양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동시에 그렇게 완악한 죄인을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사랑하셨는지도 보여 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힘으로 굳은 마음을 고칠 수 있었다면 십자가가 왜 필요했겠습니까?
복음은 먼저 자신을 고쳐 놓고 오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달라질 수 없는 내가 빈손으로 어린양께 돌아가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주님, 제가 틀렸습니다. 제가 붙들었던 것이 저를 살릴 수 없습니다.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맺는말
우리는 처음에 물었습니다. “이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런데 요한계시록 9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 질문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세상이 완악하다고 말하기 전에 내 마음부터 보십시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데도 내가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의 왕좌에는 지금 누가 앉아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9장의 마지막 말은 두렵습니다.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더라.”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뒤에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에는 하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어린양께서 역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았습니까?
내 마음의 왕좌에서 내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합니다. 내가 왕이었던 자리에서 내려옵니다.
주님, 내가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