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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길 (03.29.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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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회 작성일 Mar 3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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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3월 29일
본문: 요한복음 7:1-10
제목: 십자가의 길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국제 뉴스는 마치 거대한 ‘힘의 전시장’과 같습니다. 첨단 무기가 도시를 파괴하고, 강대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세계 경제를 뒤흔듭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포성이 멈추지 않고, 중동에서는 수천 년 된 증오가 다시 피의 복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이스라엘, 이란이 얽힌 전쟁이 미사일과 드론, 탄도탄 등 최첨단 무기와 아울러 모든 공격 지점과 시기, 방법을 인공지능이 결정하여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붓습니다.

이 모든 비극 뒤에는 단 하나의 냉혹한 논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힘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논리입니다.

찰스 다윈이 말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이제 단순한 생물학적 이론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신념이 되었습니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된다는 이론을 삶의 철학으로 받아드린 현대인들은 모든 문제를 힘의 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힘이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한경쟁 시대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누구나 힘을 추구하고 축적해 갑니다. 이 힘이 있어야 살 수 있고, 힘이 없으면 무너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과거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인간은 늘 힘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십시오. 그 신화의 내용은  신들의 파워 게임, 힘의 경쟁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힘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들 마음 속에 있는 힘의 숭배를 신화 이야기에서 표현한 거에요. 그리고 로마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표적을 요구했어요. 네가 진정 메시야라면 모세처럼 홍해를 가르며 광야에서 만나를 먹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 보라는 거에요. 그 능력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다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라는 겁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경제적 문제, 사회 부조리와 악을 제거하는 정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꿈꾸던 메시야는 이처럼 다윗 왕같이 힘을 가진 메시야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들도 힘을 숭배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기독교의 역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령 19세기,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교회는 제국주의와 타협함으로써 식민지 국가와 민족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많은 오해를 심어주었습니다. 교회는 정치와 군사의 힘과 손을 잡으며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고,  그 결과 많은 오해와 상처를 남겼습니다. 선교사들이 들어가면 그 뒤를 이어 총과 대포가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제3세계에서는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불신합니다. 여기에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때로는 복음의 능력보다는 교인의 숫자와 재정의 크기로 교회의 힘을 자랑하고, 세상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결코 힘의 논리로 세상을 설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단 한 번도 힘으로 인간을 굴복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미사일과 자본’으로 평화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할 때, 하나님은 가장 무력해 보이는 방법, 즉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해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은 묻습니다. “죽어가는 마당에 사랑이 무슨 힘이 있느냐?” 그러나 힘은 사람을 굴복시킬 순 있어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원한과 보복과 피의 살육을 만들어 낼 뿐 참된 평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인간의 깨어진 마음을 만지고, 원한과 증오의 고리를 끊습니다.

오늘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힘의 길’을 따라갈 것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길’을 갈 것입니까?

1. 십자가의 역설-힘의 논리를 거절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공생애는 끊임없는 ‘힘의 유혹’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광야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 첫 번째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마귀가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 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잠깐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메시야 사역을 해보라는 거에요.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쉽고 화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의 명절 초막절에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을 드러내라고 권합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의 권세와 능력이 있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절기에 영향력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어 추종자를 규합하고, 그 세력으로 큰 일을 해보라는 거에요. 형제들의 생각은 철저히 힘의 논리였습니다. 드러내고, 인정받고,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늘 이런 힘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로 다투었어요.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운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로마 세력을 꺾고 왕이 되실 거라고 기대했던 거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렸을 때도 사람들은 조롱하면서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말합니다. 남을 구원하면서 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비웃습니다. 힘을 사용하라고 충동질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힘의 유혹을 참아냅니다. 그리고 오히려 힘 없는 자처럼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결코 힘이 없어서 붙잡혀 죽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유혹을 거절하시면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 때란 어느 때를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때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가장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가리켜 예수께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이것을 통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역설이 있습니다. 너무 위대하시고 강하신 성자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 방어 수단이 없고 전적으로 남을 의지해야 하는 유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연약함의 극단인 죽음까지 맛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추악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그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이 구원을 힘을 사용하여 이루지 않았어요. 그 힘의 유혹을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의 연약함으로 죄의 세력을 가진 사단의 권세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구원의 길로 십자가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를 영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영광스롭게 나타내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진하게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배가 아니라 희생으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이해-죄의 이해

우리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죄란 단순히 ‘나쁜 행동’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면 보완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를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죄를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진 힘, 파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파워라고 말해요. 그것은 마치 법, 법칙과도 같아요. 법칙이 무엇입니까? 가령 제가 여기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언제나 밑으로 떨어집니다.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죠. 이 자연법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작용해요. 이처럼 죄는 압도적으로, 거의 일방적으로 역사하는 파워입니다.

죄의 시작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합니다. 인간은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홀렸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부여된 중요한 위치와 책임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에 있어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피조물을 다스리는 특별한 위치에 있는 거예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권력을 알고 그 맛을 본 존재입니다. 사단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충동해서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도록 유혹한 겁니다.

죄라는 파워는 이렇게 인간이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피조물이라는 위치를 떠나 하나님과 같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고 그것을 도전하게 합니다. 즉 파워를 갖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는 힘을 갖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적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중심주의와 이기주의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항상 자신이 중심이고자 합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주의는 무엇보다 먼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시 마음에 따라 조종하려고 해요. 자기 영향력 아래 묶어두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가 불화하고 원수가 됩니다. 서로 대적하여 싸웁니다. 로마서 1:28-31절을 보면 죄의 목록이 열거되는데 거기에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죄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를 파괴하는 죄목입니다.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근수근, 비방하는 자, 교만, 자랑하는 자,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라고 열거합니다. 이렇게 이웃을 무시하고 비방하며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중심에 서서 자기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죄는 인간을 지배하는 힘, 권세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려면 이런 죄의 속성을 잘 깨달아야 해요.

3. 십자가의 구원-죄의 파워로부터 구원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그 해법은 단순히 우리의 잘못된 행위들에 대한 처벌을 면하게 해 주시는 차원이 아니예요. 물론 십자가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렇게 용서 받아도 죄의 세력이 작용하는 이상,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든지 죄의 세력에 굴복하여 또다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근본 원인에 대한 해결책도 주셨어요. 그것은 죄의 파워,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2,000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나도 죄에 대해서 죽었어요. 죽어 버린 나에게 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죽었기 때문에 죄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으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 대항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살던 옛사람이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의와 거룩과 생명이 충만한 삶으로 살아갑니다. 성령님은 이런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삶이 구원의 삶입니다. 현재 구원을 누리는 삶을 말해요. 그리고 성령님은 미래 구원에 대한 보증이기도 합니다. 미래에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보증 또는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삶의 핵심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4. 십자가의 삶-자기 희생, 섬김, 사랑

이렇게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 희생, 섬김,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종이 되어서 섬김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제자는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길을 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것, 가정에서 한 번 더 섬기는 것, 직장에서 동료를 세워 주는 것—세상은 이를 ‘바보 같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승리’라고 부르십니다.

물론 십자가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시간도, 노력도 많이 듭니다. 희생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는 힘을 좋아합니다. 힘의 매력이 대단합니다. 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어 보이거든요. 한 마디 명령으로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얼마나 쉬워요. 그러나 사랑으로 살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사람들은 힘으로 일하려 합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힘을 숭배합니다. 그래서 힘의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힘의 논리에 빠진 자에게는 십자가가 대단히 어리석게 보여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깨닫기 전까지 예수님의 형제들, 제자들, 그리고 바울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십자가가 어리석어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의 길보다 힘의 길을 추종하는 경향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규모가 커야 큰 일을 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뭔가 할 수 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일할 수 있다’ 등, 이런 말 속에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의 논리에 휩쓸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 마져도 자신의 힘으로 삼아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 합니다. 성령의 삶을 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성령의 능력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본래 성령님은 복음을 전파할 때 필요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믿는 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마저 오용하여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듭니다. 마치 자신이 성령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합니다. 물론 성령의 삶은 분명히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섬김의 능력입니다. 자기 희생의 능력입니다. 순종의 능력을 말합니다. 희생하여 섬기는 삶을 통해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 진정한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힘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입니다.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길입니다.
지배하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고난주간을 앞두고 다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힘의 길인가, 십자가의 길인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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