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습니까 (03.22.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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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6회 작성일 Mar 23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3월 22일
본문: 마태복음 8:28-34
제목: 당신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습니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마태복음 8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세로 불치병이었던 문둥병과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성난 바다와 거친 바람을 말씀 한마디로 잠잠케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세’는 단순히 힘이 센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힘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정당한 권한, 곧 법적이고 신분적인 ‘권한’입니다. 예를 들어, 경찰은 차를 세울 권한은 있지만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반면 간수는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즉 능력은 있지만, 상부의 허락 없이는 죄수를 풀어 줄 권세가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능력과 권세가 일치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연 앞에서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폭풍과 홍수, 가뭄과 지진 같은 현상을 이해할 수 없어, 신이 진노한 것으로 여기며 제사를 지내고 굿을 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심을 늘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다스리시는 권세를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을 때 일입니다. 공동묘지에 살던 귀신 들린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고, 너무도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자 큰 소리로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소리칩니다. 이 말은 “내 삶에 간섭하지 말라. 나를 그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이' 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은 이미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귀신들에게 완전히 지배 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주체성을 상실한 채 짐승처럼 살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에게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허락을 받자마자 돼지 떼는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합니다.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두 영혼이 마귀의 사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수천 마리의 재산보다 한 영혼이 더 소중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에게는 손실된 재산이 회복된 생명보다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계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무너진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능력과 위엄과 권세를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만물을 다스리시며, 내 삶의 주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니까 하나님과 그 나라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 눈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1. 악한 영들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현대인들은 악한 영들의 실체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시대적 미신이나 정신적 심리적 질환으로 치부하려 합니다. 그래서 귀신 들린 현상을 정신질환, 정신분열증, 신경쇠약 등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성경은 우리에게 악한 영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역사한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단순히 아픈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쇠사슬도 끊어버리는 괴력을 가졌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지배 당한 인생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유사한 모든 현상을 귀신 들림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정신적 질환에서도 이런 유사한 증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현대 의학이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기도해야 하지만, 병원이나 심리상담자에게 데리고 가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 들림의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상담치료나 약물치료만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질환에 속한 병이냐, 아니면 귀신 들림에서 오는 것이냐?’ 일반적으로 정신질환은 약을 복용하면 일단 효과가 조금이라도 나타납니다. 반면에 귀신 들린 경우에는 약물치료가 전혀 도움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귀신을 쫓아내면 즉각 정신이 온전해집니다. 반면에 정신질환의 경우에는 계속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받아야 조금씩 차도를 보입니다.
우리는 악령의 역사를, 꼭 귀신 들려 광란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합리적 계산’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스승 예수를 판 것은 마귀의 협박 때문이 아나라 그의 마음에 스승을 팔 생각을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가룟 유다는 마귀가 주는 생각인 줄을 모르고, 자기 생각으로 받아들여 예수를 판 것일 수 있습니다.
반면 베드로의 경우는 주님을 향한 충성심으로 이용하여 찾아옵니다. 예수께서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앞장서 예수님을 가로막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죽다니요?!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이 말을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주 날카롭게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보다 더 심한 책망은 없을 것입니다. “사단이라니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고상한 선의마저도 사단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는 그 마음과 생각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주 칭찬 받을 만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로막는 말이었습니다.
마귀는 악한 모습이 아니라, 때로 가장 그럴듯한 생각, 가장 합리적인 판단, 가장 선한 의도를 가장하여 우리를 미혹합니다. 이렇게 광명의 천사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분별의 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악한 영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마귀에게 속고 있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악의 세계는 실제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2. 예수님 앞으로 나올 때 악령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18장에서 우리는 아주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보고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하고 물었습니다. 아직 주님의 정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단번에 “하나님의 아들이여”라며 그분을 정확히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29절,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들을 불 못에 집어넣을 수 있는 심판주임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참모습을 바로 인식한 것입니다. (계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들은 장차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운명이라는 것을 알기에 예수께 사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우리 일에 상관하지 마십시오. 아직 작정된 때가 이르지 않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요한 1서 1: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래 어둠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참 빛이 되십니다. 이 빛이 세상에 비췰 때 어둠의 왕국의 실체가 나타납니다. 귀신들의 활동이 드러납니다. 마귀의 공작과 궤계가 탄로납니다. 거짓과 가식과 허위가 폭로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분석과 연구로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생깁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귀신의 세력도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체가 다 폭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부어지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귀신들은 도저히 자기 몸을 숨길 수 없어서 자폭하며 나타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취면 더 이상 그들은 자기 정체를 감출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 해석되지 않는 혼란과 혼동이 있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갈등이 있습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빛 되신 주님께서 그 배후의 어둠을 반드시 드러내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권세로 악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귀신에게 매여 있던 두 사람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왜입니까? 잃어버린 돼지 2,000마리가 영혼의 구원 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영혼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어떤 것을 붙잡고 주님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마귀의 일은 무엇입니까?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 마귀는 파괴자입니다. 약탈자입니다. 인간을 괴롭게 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흉입니다. 어둠의 영입니다. 교만의 영입니다. 분열의 영입니다. 파괴의 영입니다. 저주의 영입니다. 음란의 영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역사하면 인생이 망가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더 이상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부리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마귀가 우리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더 이상 마귀가 죄 짓도록 강제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의 옛 성품도 함께 못 박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가 권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 되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더 이상 사단의 권세가 힘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 권세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권세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제 하나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권세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행사하게 하십니다.
결론:
사람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구원이란 바로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마귀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사랑의 왕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권세를 우리는 단지 지식으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이유 없는 우울함이나 분노, 중독적인 유혹이나 가정을 분열시키려는 속삭임이 들려올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마음과 가정을 어지럽히는 어둠의 세력은 묶임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너는 아무 권한이 없다! 떠나가라!”고 담대히 선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가지고 날마다 담대하게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짜: 2026년 3월 22일
본문: 마태복음 8:28-34
제목: 당신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습니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마태복음 8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권세로 불치병이었던 문둥병과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성난 바다와 거친 바람을 말씀 한마디로 잠잠케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세’는 단순히 힘이 센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힘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정당한 권한, 곧 법적이고 신분적인 ‘권한’입니다. 예를 들어, 경찰은 차를 세울 권한은 있지만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할 능력은 없습니다. 반면 간수는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즉 능력은 있지만, 상부의 허락 없이는 죄수를 풀어 줄 권세가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능력과 권세가 일치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연 앞에서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폭풍과 홍수, 가뭄과 지진 같은 현상을 이해할 수 없어, 신이 진노한 것으로 여기며 제사를 지내고 굿을 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심을 늘 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다스리시는 권세를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셨을 때 일입니다. 공동묘지에 살던 귀신 들린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고, 너무도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보자 큰 소리로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소리칩니다. 이 말은 “내 삶에 간섭하지 말라. 나를 그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이' 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은 이미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귀신들에게 완전히 지배 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주체성을 상실한 채 짐승처럼 살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에게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허락을 받자마자 돼지 떼는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몰사합니다.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두 영혼이 마귀의 사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수천 마리의 재산보다 한 영혼이 더 소중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에게는 손실된 재산이 회복된 생명보다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계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무너진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것은 영적 세계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능력과 위엄과 권세를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만물을 다스리시며, 내 삶의 주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니까 하나님과 그 나라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 눈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1. 악한 영들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현대인들은 악한 영들의 실체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시대적 미신이나 정신적 심리적 질환으로 치부하려 합니다. 그래서 귀신 들린 현상을 정신질환, 정신분열증, 신경쇠약 등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성경은 우리에게 악한 영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역사한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단순히 아픈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쇠사슬도 끊어버리는 괴력을 가졌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지배 당한 인생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유사한 모든 현상을 귀신 들림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정신적 질환에서도 이런 유사한 증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현대 의학이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기도해야 하지만, 병원이나 심리상담자에게 데리고 가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귀신 들림의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상담치료나 약물치료만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신질환에 속한 병이냐, 아니면 귀신 들림에서 오는 것이냐?’ 일반적으로 정신질환은 약을 복용하면 일단 효과가 조금이라도 나타납니다. 반면에 귀신 들린 경우에는 약물치료가 전혀 도움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귀신을 쫓아내면 즉각 정신이 온전해집니다. 반면에 정신질환의 경우에는 계속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받아야 조금씩 차도를 보입니다.
우리는 악령의 역사를, 꼭 귀신 들려 광란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합리적 계산’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스승 예수를 판 것은 마귀의 협박 때문이 아나라 그의 마음에 스승을 팔 생각을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가룟 유다는 마귀가 주는 생각인 줄을 모르고, 자기 생각으로 받아들여 예수를 판 것일 수 있습니다.
반면 베드로의 경우는 주님을 향한 충성심으로 이용하여 찾아옵니다. 예수께서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앞장서 예수님을 가로막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죽다니요?!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이 말을 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주 날카롭게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보다 더 심한 책망은 없을 것입니다. “사단이라니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고상한 선의마저도 사단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는 그 마음과 생각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주 칭찬 받을 만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로막는 말이었습니다.
마귀는 악한 모습이 아니라, 때로 가장 그럴듯한 생각, 가장 합리적인 판단, 가장 선한 의도를 가장하여 우리를 미혹합니다. 이렇게 광명의 천사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분별의 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악한 영의 존재를 부인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마귀에게 속고 있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악의 세계는 실제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2. 예수님 앞으로 나올 때 악령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18장에서 우리는 아주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보고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하고 물었습니다. 아직 주님의 정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단번에 “하나님의 아들이여”라며 그분을 정확히 파악했다는 점입니다. 29절,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들을 불 못에 집어넣을 수 있는 심판주임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참모습을 바로 인식한 것입니다. (계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들은 장차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운명이라는 것을 알기에 예수께 사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우리 일에 상관하지 마십시오. 아직 작정된 때가 이르지 않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요한 1서 1: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래 어둠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참 빛이 되십니다. 이 빛이 세상에 비췰 때 어둠의 왕국의 실체가 나타납니다. 귀신들의 활동이 드러납니다. 마귀의 공작과 궤계가 탄로납니다. 거짓과 가식과 허위가 폭로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분석과 연구로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생깁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귀신의 세력도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체가 다 폭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부어지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귀신들은 도저히 자기 몸을 숨길 수 없어서 자폭하며 나타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비취면 더 이상 그들은 자기 정체를 감출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 해석되지 않는 혼란과 혼동이 있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갈등이 있습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빛 되신 주님께서 그 배후의 어둠을 반드시 드러내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권세로 악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귀신에게 매여 있던 두 사람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왜입니까? 잃어버린 돼지 2,000마리가 영혼의 구원 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계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영혼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어떤 것을 붙잡고 주님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마귀의 일은 무엇입니까? (요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 마귀는 파괴자입니다. 약탈자입니다. 인간을 괴롭게 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흉입니다. 어둠의 영입니다. 교만의 영입니다. 분열의 영입니다. 파괴의 영입니다. 저주의 영입니다. 음란의 영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역사하면 인생이 망가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더 이상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부리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마귀가 우리를 참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더 이상 마귀가 죄 짓도록 강제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의 옛 성품도 함께 못 박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가 권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 되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더 이상 사단의 권세가 힘을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그 권세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권세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제 하나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권세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행사하게 하십니다.
결론:
사람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구원이란 바로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마귀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사랑의 왕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권세를 우리는 단지 지식으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이유 없는 우울함이나 분노, 중독적인 유혹이나 가정을 분열시키려는 속삭임이 들려올 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마음과 가정을 어지럽히는 어둠의 세력은 묶임을 받고 떠나갈지어다!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너는 아무 권한이 없다! 떠나가라!”고 담대히 선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가지고 날마다 담대하게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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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po2qzVGd5wo 14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