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배에는 누가 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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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9회 작성일 Mar 16 2026본문
본문: 마태복음 8:23-27
서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세상에 너무 많은 악고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을 보십시오. 전쟁과 폭력을 보십시오. 불의와 악의가 횡행하는 사회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믿지 않는 사람들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인생의 고통 속에서 같은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고대 한 철학자도 이 딜레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신이 악을 없애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신은 전능하지 않다.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다.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고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는가?
이것이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즐겨 공격하는 '아킬레스건'과도 같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곤란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에 대해 답변을 시도하는 것을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비록 세상에 고통과 불행과 비참을 가져오는 악이 존재함에도 하나님은 선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며 공정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역사의 하나님, 자연의 하나님’. 홍해가 이스라엘의 앞길이 막았습니다. 하나님은 동풍을 보냈습니다. 밤새도록 바람이 불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처럼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은 범람하는 요단강도 멈추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저자 마태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일까요? 이 질문은 제자들이 던졌던 질문과 동일합니다. 27절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과연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 질문은 저자 마태가 이 기적을 기록하였던 의도와 직접 연결됩니다. 마태는 이 기사를 통해 예수님은 교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영적 세계만이 아니라, 자연계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서운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견디어 냈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극심한 핍박 받고 있던 성도들은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는 권세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의 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상황 또한 그분이 다스리고 계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큰 풍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지금 당신의 배에는 누가 타고 계십니까?”
1. 예수님에 대한 인식
오늘 사건의 배경은 갈릴리 바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갔습니다. 예수께서 주무실 때 갑자기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칠흑 같은 밤입니다. 광풍은 거대한 짐승처럼 배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제자들의 얼굴은 차가운 바닷물과 공포 섞인 식은땀으로 뒤범범이 되었습니다. 평생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직감했습니다. '아, 우리는 끝났다. 여기서 수장되겠구나.'
그런데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믿기 힘든 장면이 펼쳐집니다. 배 뒷편에서 예수님은 팔 베개를 하고 평온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귀에는 풍랑으로 ‘죽음의 비명’이 가득했지만, 주님의 호흡은 창조주의 ‘안식의 리듬’을 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보며 ‘이제 끝이다’라고 외쳤지만, 주님은 풍랑 너머의 ‘평온’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상황의 소음보다내 마음의 박자를 주님의 평온한 호흡에맞추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평안함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절망이 섞인 항의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2. 믿음의 도전
오늘 우리 시대에도 파도와 바람이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건강의 풍랑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의사가 말합니다. “종양이 보입니다.”
가정의 풍랑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녀가 말합니다. “아버지,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가정의 위기와 건강의 문제가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쉽게 깨지기 쉬운지를, 인간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그리고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의 기도는 달라집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솔직하고 정직해 집니다. 밋밋하던 기도가 눈물의 기도가 됩니다.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해 냅니다. 주님을 붙잡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겪는 믿음의 위기는 내 삶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데 주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입니다. 그 침묵이 우리를 더욱 두렵게 만듭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풍랑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광풍을 향해 꾸짖습니다. “잠잠하라!” 그 순식 모든 것이 잔잔하여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함께 배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풍랑을 만난 것처럼, 왜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도 풍랑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그 방식을 고집하며 살기에는 이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의 방식과 처세술을 가지고 살아가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고, 그 방식과 원칙을 고집하며 살려면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바다에는 언제나 큰 풍랑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보통 풍랑이 아닙니다. 곧 죽을 것만 같은, 곧 침몰할 것만 같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풍랑이 덮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그 풍랑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뒤로 후퇴하지 말라 하십니다. 후퇴하는 자를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12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10명은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고 보고합니다. 가나안 부족들은 아주 장대한 사내 대장부들이고, 우리는 메뚜기와도 같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 보고 내용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군사적, 전략적인 객관적인 관찰과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보고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10명의 정탐꾼 보고가 인간적인 면에서 100% 사실이었다 할지라도 신앙적으로 볼 때 100% 거짓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보고는 이스라엘을 낙망케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보니 저들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거인들이 자신들의 밥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올라가서 싸우자!”왜입니까?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골리앗이 다윗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계산은 달랐습니다. 골리앗과 내가 싸우면 내가 진다. 하지만 골리앗과 하나님이 싸우면 하나님이 이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풍랑과 제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풍랑이 이깁니다. 그런데 풍랑과 예수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항상 예수님이 이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랑이 없는 삶을 구할 것이 아니라 풍랑 보다 크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종교 지도자가 아닙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이 우주 만물을 붙들고 운행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유의 주가 되시는 주께서 한 마디 말씀하시면 바람도 순종하고, 바다도 순종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3. 권세에 순복하는 삶
본래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겸손히 우리처럼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당한 권세와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권세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심지어 바람과 바다까지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까지도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죄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차원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 권세에 대적하는 것이 죄입니다. 즉 죄의 근본은 자기중심주의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자기 왕국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 왕국을 지키기 위해 굳게 자물쇠를 걸어 놓습니다. 주님의 권세에 순복치 않습니다. 타락한 천사장 사단의 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그 권세에 순복하고, 어떤 이들은 불신앙으로 대적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많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어 주님의 권위에 순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롬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이 내어 민 왕의 금홀에 입 맞추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시 2:11-1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오늘날 왜 교회가 무력한 상황에 빠져 있을까요? 왜 우리 삶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권세를 온전히 믿지 못하거나, 또 그 권위에 완전히 순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을 때 주님의 권세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이전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고, 더 많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으나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만큼 결실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교회에 ‘주님의 권세에 압도 당하는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권위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 교회에 권세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2:40-41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여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였습니다. 권세가 함께하는 강력한 증거 앞에서 허다한 제사장 무리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머지 유대인 불신자들도 감히 저들과 함께 행동하지는 못할망정 초대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고 인정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당당하고 담대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주신 권위와 권세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힘으로써 상황 종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초대교회는 이 권세와 권위를 가지고 세상을 뒤엎은 것입니다. 이 권위가 권세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권위 아래 순복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하늘의 권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강해지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얼마나 신뢰하고 그분께 나를 맡기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권세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 나갑니까? 성경은 약속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내가 대단한 초능력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권세는 내 주머니에 든 돈이 아니라, 왕이 내어준 ‘어명(御命)이 담긴 마패’와 같습니다. 마패를 든 암행어사 개인의 힘은 미약할지 몰라도, 그 마패 뒤에는 국가의 전권과 왕의 권위가 실려 있습니다. 그 마패를 꺼내 드는 순간, 산천초목이 벌벌 떨며 왕의 명령에 복종하게 됩니다.
성도의 권세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바다로 나갈 때, 풍랑은 여전히 높고 우리의 배는 작아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배에는 누가 타고 계십니까?
풍랑이 여러분의 배를 흔들 수는 있어도, 그 배의 주인이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삼킬 수는 없습니다. 그 배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 배는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풍랑을 보며 두려워하기보다, 내 배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의 권세를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마패를 꺼내 들듯 선포하십시오.
“만유의 주인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 배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어떠한 광풍 속에서도 주님의 평안을 누리며, 주님이 주신 자녀의 권세로 당당히 승리하며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세상에 너무 많은 악고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을 보십시오. 전쟁과 폭력을 보십시오. 불의와 악의가 횡행하는 사회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믿지 않는 사람들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인생의 고통 속에서 같은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고대 한 철학자도 이 딜레마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신이 악을 없애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신은 전능하지 않다.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다.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고도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는가?
이것이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즐겨 공격하는 '아킬레스건'과도 같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곤란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에 대해 답변을 시도하는 것을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비록 세상에 고통과 불행과 비참을 가져오는 악이 존재함에도 하나님은 선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며 공정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역사의 하나님, 자연의 하나님’. 홍해가 이스라엘의 앞길이 막았습니다. 하나님은 동풍을 보냈습니다. 밤새도록 바람이 불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처럼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은 범람하는 요단강도 멈추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연과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저자 마태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일까요? 이 질문은 제자들이 던졌던 질문과 동일합니다. 27절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과연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 질문은 저자 마태가 이 기적을 기록하였던 의도와 직접 연결됩니다. 마태는 이 기사를 통해 예수님은 교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영적 세계만이 아니라, 자연계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서운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견디어 냈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극심한 핍박 받고 있던 성도들은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는 권세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물의 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상황 또한 그분이 다스리고 계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큰 풍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지금 당신의 배에는 누가 타고 계십니까?”
1. 예수님에 대한 인식
오늘 사건의 배경은 갈릴리 바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갔습니다. 예수께서 주무실 때 갑자기 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칠흑 같은 밤입니다. 광풍은 거대한 짐승처럼 배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제자들의 얼굴은 차가운 바닷물과 공포 섞인 식은땀으로 뒤범범이 되었습니다. 평생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직감했습니다. '아, 우리는 끝났다. 여기서 수장되겠구나.'
그런데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믿기 힘든 장면이 펼쳐집니다. 배 뒷편에서 예수님은 팔 베개를 하고 평온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귀에는 풍랑으로 ‘죽음의 비명’이 가득했지만, 주님의 호흡은 창조주의 ‘안식의 리듬’을 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보며 ‘이제 끝이다’라고 외쳤지만, 주님은 풍랑 너머의 ‘평온’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상황의 소음보다내 마음의 박자를 주님의 평온한 호흡에맞추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평안함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절망이 섞인 항의였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2. 믿음의 도전
오늘 우리 시대에도 파도와 바람이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건강의 풍랑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의사가 말합니다. “종양이 보입니다.”
가정의 풍랑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녀가 말합니다. “아버지,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가정의 위기와 건강의 문제가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쉽게 깨지기 쉬운지를, 인간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그리고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의 기도는 달라집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솔직하고 정직해 집니다. 밋밋하던 기도가 눈물의 기도가 됩니다.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해 냅니다. 주님을 붙잡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겪는 믿음의 위기는 내 삶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데 주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입니다. 그 침묵이 우리를 더욱 두렵게 만듭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풍랑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광풍을 향해 꾸짖습니다. “잠잠하라!” 그 순식 모든 것이 잔잔하여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함께 배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풍랑을 만난 것처럼, 왜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도 풍랑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그 방식을 고집하며 살기에는 이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의 방식과 처세술을 가지고 살아가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고, 그 방식과 원칙을 고집하며 살려면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바다에는 언제나 큰 풍랑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보통 풍랑이 아닙니다. 곧 죽을 것만 같은, 곧 침몰할 것만 같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풍랑이 덮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그 풍랑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워 뒤로 후퇴하지 말라 하십니다. 후퇴하는 자를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12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10명은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고 보고합니다. 가나안 부족들은 아주 장대한 사내 대장부들이고, 우리는 메뚜기와도 같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 보고 내용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군사적, 전략적인 객관적인 관찰과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보고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10명의 정탐꾼 보고가 인간적인 면에서 100% 사실이었다 할지라도 신앙적으로 볼 때 100% 거짓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보고는 이스라엘을 낙망케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보니 저들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거인들이 자신들의 밥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올라가서 싸우자!”왜입니까?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골리앗이 다윗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계산은 달랐습니다. 골리앗과 내가 싸우면 내가 진다. 하지만 골리앗과 하나님이 싸우면 하나님이 이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풍랑과 제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풍랑이 이깁니다. 그런데 풍랑과 예수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항상 예수님이 이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랑이 없는 삶을 구할 것이 아니라 풍랑 보다 크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종교 지도자가 아닙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이 우주 만물을 붙들고 운행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유의 주가 되시는 주께서 한 마디 말씀하시면 바람도 순종하고, 바다도 순종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3. 권세에 순복하는 삶
본래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겸손히 우리처럼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당한 권세와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권세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심지어 바람과 바다까지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까지도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죄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차원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 권세에 대적하는 것이 죄입니다. 즉 죄의 근본은 자기중심주의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자기 왕국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 왕국을 지키기 위해 굳게 자물쇠를 걸어 놓습니다. 주님의 권세에 순복치 않습니다. 타락한 천사장 사단의 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그 권세에 순복하고, 어떤 이들은 불신앙으로 대적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많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어 주님의 권위에 순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롬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이 내어 민 왕의 금홀에 입 맞추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시 2:11-1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오늘날 왜 교회가 무력한 상황에 빠져 있을까요? 왜 우리 삶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권세를 온전히 믿지 못하거나, 또 그 권위에 완전히 순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을 때 주님의 권세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이전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고, 더 많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으나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만큼 결실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교회에 ‘주님의 권세에 압도 당하는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권위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 교회에 권세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말씀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2:40-41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여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였습니다. 권세가 함께하는 강력한 증거 앞에서 허다한 제사장 무리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머지 유대인 불신자들도 감히 저들과 함께 행동하지는 못할망정 초대교회 성도들을 칭찬하고 인정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당당하고 담대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주신 권위와 권세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힘으로써 상황 종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초대교회는 이 권세와 권위를 가지고 세상을 뒤엎은 것입니다. 이 권위가 권세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권위 아래 순복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하늘의 권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강해지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얼마나 신뢰하고 그분께 나를 맡기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권세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 나갑니까? 성경은 약속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내가 대단한 초능력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권세는 내 주머니에 든 돈이 아니라, 왕이 내어준 ‘어명(御命)이 담긴 마패’와 같습니다. 마패를 든 암행어사 개인의 힘은 미약할지 몰라도, 그 마패 뒤에는 국가의 전권과 왕의 권위가 실려 있습니다. 그 마패를 꺼내 드는 순간, 산천초목이 벌벌 떨며 왕의 명령에 복종하게 됩니다.
성도의 권세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바다로 나갈 때, 풍랑은 여전히 높고 우리의 배는 작아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배에는 누가 타고 계십니까?
풍랑이 여러분의 배를 흔들 수는 있어도, 그 배의 주인이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삼킬 수는 없습니다. 그 배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 배는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풍랑을 보며 두려워하기보다, 내 배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의 권세를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마패를 꺼내 들듯 선포하십시오.
“만유의 주인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 배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어떠한 광풍 속에서도 주님의 평안을 누리며, 주님이 주신 자녀의 권세로 당당히 승리하며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