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후서 2:14-17
근래 한국 개신교에 관한 뉴스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교회가 세상을 염려해야 할 터인데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염려하게 되었구나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영화 <도가니>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분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이 영화는 2005년 광주의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벌어진 충격적 사건을 다룬 작가 공지영씨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청각장애인학교에 부임한 한 미술교사가 오랫동안 빈번하게 자행되어 왔던 끔찍한 구타와 성폭행, 성추행의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장애 아이들의 자살이 구타와 성폭행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그 가해자는 다름 아닌 학원 설립자의 아들들인 교장과 행정실장이고, 여기에 생활지도교사도 가세했던 것입니다. 주인공은 뜻있는 분들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고 세상에 알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학원과 결탁한 교육청, 시청, 경찰서, 교회 등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온갖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가해자들은 재판에 회부됩니다. 주인공과 아이들은 진실이 규명되고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습니다. 그런데 가해자와 기득권세력의 시스템은 재판 과정에서도 법의 약점을 이용하여 더 악랄하게 굴고, 피해아이들은 재판과정에서 또 한 번 인권유린을 당합니다. 결국 기대와 전혀 다른 재판결과는 피해자 측에 커다란 상처와 절망을 안겨주고 맙니다.
이 영화로 인해 이 사건은 다시 뉴스의 초점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건을 재조사하게 되고 국회가 관련 법률을 개정하는 일로 파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극악스러운 범죄가 교육기관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고, 그러한 범죄를 묵인하고 은폐하고 엄호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충격적이고 부끄러운 사실은 힘없는 장애 소년 소녀들을 농락한 교장이 그 도시에 있는 대형 교회의 장로이며, 그를 에워싼 공범자들도 대부분 그 교회 교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교회 안에서만 보아진 그들의 모습에 그들을 두둔하고 축복해 줍니다.
이 사건은 지금 한국 교회가 얼마만큼 부패해져 가고 있는 한 상징성을 지닌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때 민족의 등불이 되었던 한국 교회가 이제는 한국 사회의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상처 받고 교회로부터 돌아서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초창기 기독교는 복음을 통해서 일본제국에 주권을 상실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이 개화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가 당시 전체 인구의 2%가 채 안 되는 소수였음도 불구하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3.1운동을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이끌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교회에서 훈련받아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또한 민족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계 교회 역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운 새벽기도와 헌신과 열정을 통해서 패배의식과 가난에 찌들어 있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방탕, 나태와 도박, 술, 담배 등 나쁜 습성들을 버리고 근면하고 생산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개인의 삶과 가정이 치유되고,사회와 국가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흐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교회 또한 기독교 역사에서 보기 드문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안팎에 걸쳐 큰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루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추문들, 교단과 신학교의 다툼과 분열들, 교회 권력과 명예를 둘러 싼 싸움들이 한국 개신교를 큰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추문들과 혼란은 개신교인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개신교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그룹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데 큰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개신교가 지금 세상에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만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종교입니다. 오늘 본문 15, 16절을 보십시오. (고후 2:15-16)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했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긴 장군이 원로원의 허락아래 개선식을 행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개선행렬에 운반되어 가는 전리품들이 많을수록 개선장군의 영광은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그 보물들과 함께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로 끌려온 야만인들의 왕이나 장군들의 관람이 이 승리 축하 행사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시저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때 그는 수많은 갈리아의 보물을 가지고 들어와서 로마시민들을 놀라게 하였고 그 이익을 시민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개선식 행사 마지막에는 저항세력의 수장이었던 베르킨케토릭스를 사형시켰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아래 여러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선식 광경을 그려보십시오. 여기 전쟁에서 이긴 장군이 백말들이 끄는 전차를 타고 휘하 장병들을 거느리고 입성합니다. 그 뒤에는 전쟁 포로들과 전리품들이 따릅니다. 양 길가에 서 있는 시민들은 환호와 박수로 그들을 맞이합니다. 온 성안에는 신들, 특히 승리의 여신인 나이키 신에게 바치는 향을 피워서 향기가 충만하게 됩니다. 이러한 개선행렬의 종점은 쥬피터 신전인데 거기서 포로 중 우두머리를 죽여 개선의 제물로 바칩니다.
그래서 개선행렬에서 피우는 향은 승리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멸망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포로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멸망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지만,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정죄와 심판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막16:16). 이를 볼 때 복음 전파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과 사를 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의 향기(the aroma of Christ)’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즉 소유격 ‘그리스도의’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이 향기가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며, 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냄새를 풍기는 것은 우리 자신의 도덕적 수행과 고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거하셔서 내 삶을 주장하시고, 내가 그분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갈 때 그분의 향기가 내 삶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들이신 그분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들로서 권리 주장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섬기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대속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분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어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합니다. 조롱과 핍박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들을 용서합니다. 그분이 무슨 잘못이 있었나요? 아닙니다. 그분은 백성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그들을 먹이시고, 그들의 질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들을 쫓아주셨습니다. 방황하는 그들에게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어요. 죄인들이라고 멸시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대하셨어요. 그러나 불의에 대해서 단호히 대처하셨습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으셨어요. 세상 권력 앞에서 강하고 담대하셨어요. 동시에 그분에게는 사랑이 있었고, 삶의 희열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습니다. 악인들에 대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죄인들을 자비로 대하셨습니다. 흙탕물 같이 죄악이 관영하고 기득권 세력의 비열한 술수가 춤을 추는 세상에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셨어요.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시고 치유하셨습니다.
그분은 향내 나는 향나무와도 같습니다. 살아계실 때에도 향냄새를 풍기셨고, 죽으실 때에도 진하게 향냄새를 내뱉었습니다. 향나무가 그렇습니다. 나무꾼에게 도끼로 찍혀도 향나무는 독을 내는 것이 아니라 향냄새를 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할 때에도 향기를 내뿜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주장하시도록 내어맡긴 자, 그분이 주장하셔서 삶을 이끌어가는 자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오랫동안 교제했더니 나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냄새에 취하고 동화되어서 흘러나오는 향기입니다.
선교사요 기독교 여성작가였던 리타 스노우덴(Rita Snowden)이 영국 데본(Devon)에 휴가를 갔습니다. 식당에 들어가 창문 곁에 자리를 잡았는데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창밖을 내다봤더니 아무런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보통 사람들이 거리를 왔다 갔다 할 뿐이었습니다. 향내를 참지 못한 리타가 바깥으로 나갔더니만 향내는 더욱 더 강렬하게 코끝을 자극했습니다.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온 리타는 주인에게 냄새의 출처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답변하길 “아, 손님께서 잘 모르시는군요. 이 동네에는 향수 만드는 공장이 있답니다. 지금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어서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 이렇게 아름다운 향내가 온 동네에 진동하는 거랍니다.”
향수 화장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장 밖으로 나갈 때마다 아름다운 향내를 온 동네에 두루 퍼지게 하는데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밖으로 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정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므로 생명에 이르는 냄새 곧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는커녕 시궁창 냄새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민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더 충만하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고민해 보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리스도께서 향기의 근원이 되시기에 우리에게서 향기가 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묵상하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다보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세상에 빠져있으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수 없습니다. 세상 정욕에 사로잡히고, 세상 욕망에 집착하고, 세상적인 것에 몰두하다보면 결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우리가 가지로서 열매 맺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주님과 더불어 사랑하며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무를 보십시오. 가지가 어정쩡하게 나무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태풍이 심하게 불어 뿌리가 뽑힐지언정 가지는 나무에게서 꼭 붙어 있습니다. 이처럼 가지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결코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고 굳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붙어 있되 소극적으로 적당히 다리만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서 서로 연합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나무로부터 끊임없이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력을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사람이 빈혈에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얼굴이 창백하고 생기가 없습니다. 힘이 없어서 자꾸만 드러눕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빈혈에 걸리게 되면 능력이 없습니다. 내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죄에 넘어지고, 영적인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때문에 자꾸 불평과 불신적인 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다툼이 일어나고 모임이 깨집니다. 그래서 향기가 아니라 악취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어떻게 됩니까? (요 15:10-1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기쁨이 충만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쁨은 영적인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이요, 풍성한 기쁨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맺으라” “열매를 많이 맺어야만 한다”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품질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가는 곳마다 향기를 발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향기는 보이지 않지만 조용하게 널리 퍼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길 수도 있고 구린내를 풍길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을 주장하시도록 자신을 맡기며 그분께 순종하면 혼탁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