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4:21-24

 

서론: 모든 게 흔한 세상에 살다보니 교회마저 흔합니다. 너무 흔하면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 세상이 너무 물질적이다 보니 모든 것을 재는 척도가 돈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면 소중하게 여기고, 돈이 안 되는 것이면 무시합니다. 이런 세상 풍조에 젖게 되면 그리스도인들 또한 주일예배 드리러 나오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결단코 시시한 분이 아니십니다.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유지시키십니다. 이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찬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절대 진리이시고, 절대 아름다움(美)이시며, 절대 선(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표현할 때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 피조물이 취할 자세는 당연히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예배자의 자세에 대해 알려면 히브리 단어 ‘샤챠(shachah)’와 헬라단어 ‘프로스쿠네오(proskuneo)’를 알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히브리 단어 ‘샤챠(shachah)’는 ‘절하다’는 뜻입니다. 헬라단어 ‘프로스쿠네오(proskuneo)’는 손이나 발등상에 키스를 한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왕이 보좌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신하나 외국사신이 와서 왕에게 알현을 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몸을 땅에 완전히 엎드리고 왕의 발등상이나 손등에 입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상하시면 하나님 앞에 예배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 시간에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예배의 자리에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시 2:11-1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쁨과 두려움, 혹은 즐거움과 경외함,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된 감정인데도 예배자 안에 함께 나타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선 피조물로서 당연히 경외심에 압도 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분의 영광을 보고 감격과 감사, 기쁨과 희열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2011년에서 2012년으로 해가 바뀌었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 뉴스를 보십시오. 작년이나 새해나 우리 현실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 인생이 힘들고 고달플 때 어디로 가겠습니까? 기분을 풀기 위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물론 금년에도 여행을 가고, 영화관도 찾고, 친구도 만나야겠지요. 그러나 인생의 허무와 낙심을 극복하고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을 유익하게 하고, 우리 심신을 새롭게 하는 것 없습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처음에는 산뜻해 보이고 우리 기분을 새롭게 해 줄 것 같지만 결국 그게 그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것처럼 우리를 살맛나게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일단 경험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변화되어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작년에 이런 변화가 우리 교회 안에서 경험하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가장 보편적인 길은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시간에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처럼 중요하고 유익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예배를 드리는 것 보다 더 위대한 경험은 또한 없습니다. 예배는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만들어 주셨어요. 그러므로 예배의 성공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배에 성공할 것인가,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을 세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마태복음 18:20절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왜 모입니까?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주님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고 신실하기 때문에 약속대로 반드시 예배시간에 임재하십니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러 나온 우리에게 있습니다. 임재하신 주님을 우리 자신이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 입니다.

 

   마가복음 5:25-34에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도 행복의 기대감을 가지고 결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혈루병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혈루병이란 부정한 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에서 쫓겨 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아마 남편은 그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집에서 내어 보낼 때 제법 많은 돈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돈으로 12년 동안 병을 고쳐보려고 이 의원 저 의원 많은 의원에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병은 점점 악화되어갔습니다. 마침내 찾아갈 의원도 없었고 돈도 다 떨어졌습니다. 어떤 소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낳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 예수님께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외투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가 놨습니다.

 

   그 때 바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능력이 흘러들어와 병의 근원이 다 마르고 병이 깨끗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묻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내 몸에서 능력이 나갔도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옹위하고 가는데 누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무렵 예수님의 인기가 최고절정에 달해 있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 다녔어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거나 만진 사람들은 이 여인 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에 부딪히기도 하고 손도 잡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이 여인밖에 없었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선지자 예수, 뛰어나 교사이거나 선생인 예수, 민중의 기대에 부응해 줄 혁명가 예수, 심지어는 단순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만 만났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아니라 인간 예수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옹위하고 가던 그 많은 군중들과 그 여인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오게 했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믿음 없이 예수님을 만졌지만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이 여인은 능력의 주님, 구원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반드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임재하심을 믿지 않고 예배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 수 있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의무적으로 습관적으로 예배에 나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귀한 예배를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올 때 믿음을 가지고 나오라고 말씀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어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오는 사람은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던 여인처럼 우리도 예배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믿음으로 나오십시오. 하나님을 만날 것을 믿고 나오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2.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신령으로 예배드린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신령이란 단어는 원문에 ‘퓨마티(Pneumati)’라 하여 ‘성령’ 혹은 ‘영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와 악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셔서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또 다른 보혜사(위로자, 상담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 인간의 영혼을 만져 주실 때 우리 속에 불이 붙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임재 앞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하게 됩니다. 물론 탁월한 형식을 갖추고, 훌륭한 의식이나 프로그램을 가지고 예배드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성령님이 우리 영혼을 접촉하셔서 우리 영혼을 자유케 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불로 붙여져야 합니다. 이럴 때 예배 제도와 전통에 묶이지 않고 우리 영혼은 자유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본래 영은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제한이 많아요. 예배당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쇼핑몰에 있을 수 없어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여기서 밖으로 나가려면 문을 통과해야지 벽을 뚫고 나갈 수 없어요. 그런데 영은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어떤 제한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로이 개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한 마음을 억제하지 말고 자유롭게 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옆 사람을 의식하여 체면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표현을 하세요.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 가까이 나아가고 싶은 마음, 은혜 입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세요.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성도는 찬양도 목청껏 드립니다. 목소리를 아끼지 않아요. 두 손을 들기도 하고 혹은 눈을 감기도 해요. 때로는 기뻐서 뛰기도 합니다. 찬양하며 다윗처럼 춤을 출 수 있어요. 합심 기도할 때에 뜨겁게 소리 내어 기도하거나, 또는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어요.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나올 때에 나의 경험과 지식을 절대화 시키면 하나님의 뜻을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이론과 학식과 지식을 내려놔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실상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섬길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 기도를 응답하며 기적을 베풀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없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지와 오류를 인정하며 그 분 앞에 겸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론과 경험을 주장하는 대신 영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여십시오. 성령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진리 가운데 이끌어 가시도록 맡겨드리십시오. 이것이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이고, 이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3.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정이란 ‘알레테이아(Aletheia)’라는 단어인데 ‘진실, 진리, 실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나와야 할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가끔 ‘마음에 없는 말 하지마’라고 말합니다.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 그러는 척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서 이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거짓으로 꾸며서 하는 말인지 느낌이 옵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도 진정성이 없으면 우리 마음에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하는 말은 우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 꾸며서는 안 되고, 정직하고 솔직한 마음 자세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질책하신 까닭은 그들이 외식과 위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진실하지 않았어요. 엄숙히 제사는 드리고, 율법을 지켰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체 했습니다. 진실하지 못했어요.

 

   물론 우리 모두 허물이 많습니다. 완전하지 못해요. 우리가 예배 시간 조금 전 일찍 나와서 조용히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예배드리기 전 우리의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세상에서 살면서 흩뜨려진 마음, 더럽혀진 마음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 향하고, 잘못된 것은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비취도록 정직한 마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을 모실 때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모든 것을 잘 정돈하고 모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뵈러 나왔다면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정리 정돈해야 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중에도 온갖 생각이 마음에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그런 생각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만 향하도록 집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결론: 예배는 마치 심장에서 피를 펌프질하여 온 몸에 내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심장이 튼튼해서 온 몸에 팍팍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몸 안의 모든 세포에 골고루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되어 신진대사가 이루어집니다. 만약 심장의 펌프질이 시원치 않으면 그만큼 몸안의 세포와 조직과 기관에 타격을 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동감이 넘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인 삶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도 활력을 얻습니다. 삶의 보람을 얻고 감사하며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직장에서 사업 터에서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가정생활이 더욱 화평해지며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일의 중심은 마음에 있고, 그 마음의 중심에 영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이 영혼에 불길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불이 붙은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사건이 2012년 매주 드리는 예배시간에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