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18-25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며 노후를 준비합니다. 어느 누구도 행복을 원하지 않은 분은 없고, 불행을 원하는 분도 없습니다. 지금 비록 불행하더라도 내일 행복하기를 꿈꾸며 삽니다. 올해도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행복감을 만끽하며 올해 성탄절을 맞이하기도 하고, 전혀 만족치 못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복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무엇을 근거로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거나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대체적으로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외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 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재물, 명예, 성취, 편안하고 안락한 삶, 성공과 출세 등등. 만약 행복의 근거를 이런 세상적인 조건들에 두고 있다면 그 행복은 언제나 깨질 위험이 있습니다. 주가가 오르락내리락하고, 부동산 경기에 부침이 있으며, 직장생활과 사업이 언제나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우리의 건강 또한 장담할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한 농부가 랍비를 찾아와서 하소연 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이혼을 하기 위해 랍비의 허락을 받으려고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랍비님, 우리 집은 좁은데 자식들은 많고 내 아내는 지독한 악처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여자일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랍비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양을 집안에 키우시오”

 

   며칠 후 농부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랍비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악처에, 양까지! 이젠 정말 못살겠습니다."

 

   랍비가 다시 농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닭은 어디서 기르고 있소?”농부는 “닭은 양 우리 뒤쪽에 있는 닭장에서 기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랍비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는 그 닭들도 집안에서 기르도록 하시오.

 

   농부는 그 다음날 당장 달려와서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랍비님, 이젠 정말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마누라며 양, 닭 스무 마리, 아이고 맙소사!

 

   이에 랍비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양과 닭을 모두 내다가 기르도록 하시오.

 

   다음날 농부는 기쁨에 찬 얼굴로 랍비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랍비님! 이제 우리 집은 천국과 같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근거를 세상적인 조건과 환경에 두지 말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 길은 결코 견고하지 못하고 필경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영원한 가치에 행복의 근거를 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우리 행복의 근원을 두면 안전합니다. 그 무엇도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시련과 환란의 바람이 불어도 우리의 마음은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어요. 우리는 고통 가운데도 여전히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고, 그 나라는 영원히 흔들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낳은 천재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그리고 철학자이던 블레즈 파스칼이 1654년에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났을 때의 황홀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확신, 가슴 벅찬 기쁨, 그리고 평안”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완전하고 달콤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나의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항복”

 

   이것이 파스칼이 경험한 은혜의 세계이고,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도 누릴 수 있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기쁨과 평강이 흘러 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르면 얻게 될까요? 성경은 이것을 얻기 위해 어떤 자격이 필요하거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해도 좋습니다. 출세 못해도 환영합니다. 죄인이어도 환영합니다. 슬픈 일을 겪었어도 좋습니다. 지금 어려운 곤경에 놓여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요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특별한 방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분을 우리가 영접할 때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임하게 될 것이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8-25에는 예수 탄생의 중요한 의미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자라서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함축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 의미를 세 가지로 압축해서 말씀 전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하셨습니다(18)

 

   18절은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별다른 감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고 말해 보십시오. 어떤 반응이 나올지 뻔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제 정신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비과학적인 것을 믿는 우리가 한심하게 느껴질 것이고, 이어서 조롱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서로 연결된 황금사슬과 같아서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 또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기 때문입니다.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다시 화해시킬 수 있는 중보자가 필요한데 오직 예수님만이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낳으셨기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혈통으로 말미암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셨기에 인간의 타락한 성품을 가지지 않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셨습니다. 100프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100프로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 오셨다면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동정녀의 몸을 빌어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시되 죄가 없으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제물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구원자로 오셨습니다(21)

 

   다함께 21절을 읽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 예수아(여호수아)인데 이를 헬라말로 표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그분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 영원 전부터 계획되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매 이 땅에 구원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도 꼭 발견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렇다면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구세주가 꼭 필요한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23)

 

   (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은 23절에 번역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7;14-16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미리 예언하시고 이제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갈라지게 한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메추라기, 바위에서 터져 나온 물, 이런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클라이맥스는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지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중에 친히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막을 지었을 때 그 성막에 빽빽한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쉐키나(Shekinah, 하나님의 현현)’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습니다.

 

   그런데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십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 요한은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영광스러운 분이 우리와 영원토록 거하시되 섬기시는 자로 거하십니다. 우리의 왕이시되 군림하지 않으시고 종처럼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오셨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결론: 2011년 한 해를 보내며 어려운 일을 겪고 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하는 의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실패해도 우리 주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를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장차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기다리며 소망 가운데 삽니다.

 

   하나님은 구하지도, 받을 만한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이런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이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는 이 진리가 체험됩니다. 동정녀를 통하여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