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6-13

 

서론: 미국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이 쓴 <거짓의 사람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 악함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먼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병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입니다. 둘째는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고치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 게으름, 즉 책임 회피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외에 이런 심성을 가진 사람들을 조종하는 어두움의 세력, 이 세 가지를 꼽습니다.

 

   그 분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상담을 통해 악한 사람들이 지닌 병적인 나르시시즘이 책임 전가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죠. 이런 사람은 결코 사과하는 법이 없어요. 마땅히 무릎을 꿇어야 할 상황에서도 절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캇 펙은 “악의 본질적 구성 요소는 자신의 죄나 불완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드는 점이다. 악한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자신의 양심을 직시하는 고통, 자신의 죄성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고통”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 주위에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를 학대하거나 심지어 성폭행하는 부모들, 습관적으로 배우자를 속이고서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배우자 때문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도박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 거짓 학력을 얘기하는 사람들, 자신의 치부와 출세를 위해 주변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늘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희생당했다는 사람들이 악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우리 자신도 악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도 시기, 질투, 미움, 분노, 혐오, 위선, 깔봄, 게으름, 교만과 오만, 정죄 같은 것들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어요. 물론 예수를 믿게 되어 새롭게 된 참 자아는 그것들을 더 이상 원하지 않지만, 다른 한 편에 여전히 그것들을 좋아하고 있고,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다시 충동질을 받아 뛰어 나오려는 옛 성품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스캇 펙은 이 악의 문제를 우리의 선택의 문제로 봅니다. 지속적으로 병적인 자기만족, 즉 나르시시즘을 채워주며 마땅히 치러야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 게으름, 변화되는 것을 싫어하는 그 나태함을 만족시켜주는 선택을 우리가 계속할 때 우리는 악한 존재가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악을 치유하려는 씨름은 언제나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우리의 최대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죄와 악을 어둠의 세력, 어둠의 나라에 속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 즉 빛의 나라로 옮겨 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1.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우리는 대강절을 맞이하여 두 번째 성탄 메시지를 듣습니다. 오늘 제목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왜 빛이 필요합니까? 세상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영적인 어두움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빛으로 몰아낼 수 있는 어두움이 아닙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의 빛과 어둠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빛이 있습니다. 자연의 빛, 인공의 빛, 영혼의 빛입니다. 먼저 자연의 빛은 태양의 빛을 대표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시작되고, 생명의 순환이 가능하게 됩니다. 설령 생명이 있다 하여도 빛이 없다면 그 생명은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빛이 없으면 식물은 광합성을 할 수 없고, 식물이 없으면 초식동물이 존재할 수 없으며, 초식 동물이 없으면 육식 동물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빛, 태양 빛이 있기 때문에 지표가 열을 받게 되고, 지구 표면에서 받은 열량이 장소에 따라 다르므로 골고루 열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물의 순환이 일어나고, 바람과 비와 폭풍우가 생겨 지구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죠.

 

   그리고 자연의 빛을 모방하여 인간은 인공의 빛을 발명했어요. 전깃불이 그것입니다. 이 인공 빛이 있기에 사람들이 밤늦게 까지 일하고 놉니다. 제가 지난 여름 서울에 머물 때 호기심 때문에 밤 12시에 소문만 듣던 어느 시장에 구경 갔습니다. 저로서는 정말 희한했어요. 그 한 밤중에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닌다는 것에 우선 놀랐고,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분들의 그 열심과 열정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전깃불이 아닙니까? 전깃불이 있어서 어둠을 물리치고 밝은 대낮처럼 일하고 먹고 마시고 노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 자연 빛과 인공 빛 외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또 다른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이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에 비취는 빛입니다. 우리에게 이 빛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우리 영혼에는 태양 빛으로, 전기 불로 없앨 수 없는 내면 세계의 어두움과 영혼의 어두움이 있기 때문이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어두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겪는 어두움, 혼란과 혼동 속에서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어두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죄와 악에 빠져 살아가는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은 전깃불로도, 심지어 태양빛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어요. 다른 빛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참 빛을 비추어 더 이상 어둠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멸망으로 빠지지 않도록,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도록 빛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가르침과 이론과 학문들 가운데 많은 경우 우리를 잘못된 길로, 엉뚱한 길로, 심지어 미혹의 길로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길인 줄 알고 따라갔는데 막다른 골목길이 되어 버립니다.

 

2. 참 빛이 되시는 예수님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을 예수님을 세상에 비추는 참 빛이라고 소개합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 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에 비취는 참 빛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듯 이 빛은 죽음을 몰아냅니다. 죄를 몰아냅니다. 양심을 밝히 드러내고 이성을 회복하게 합니다. 이 빛을 받으면 절망하는 자가 소망을 가지게 되고, 우울한 자들에게 생기가 솟아오르며, 실패한 자들이 일어서게 됩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렇다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지금은 어떻게 이 빛을 볼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과연 이 빛이 비취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빛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비취고 있을까요?

 

   1) 하나님의 말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영혼에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고, 우리가 어디서 부터 그릇되었는지를 책망하여 깨우쳐 주고, 그래서 다시 어떻게 하면 바른 길로 갈 수 있는지를 알려 주며, 계속 의의 길로 가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우리 내면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희망과 의미와 의욕을 갖게 해주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나의 생각을 어둡게 하고,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모든 어두움의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119편 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등불을 켜야 하겠습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두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어두움을 밝히지 못하는 등불은 무슨 소용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말씀의 등불을 켜서 적극적으로 어두움을 밝히지 못하면 그 말씀은 죽은 말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있게 공부하고,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 내면에 드리워진 어둠을 드러내고 쫓아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됩니다(히 4:12-13).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위력입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 사건

      둘째로 예수님은 오늘도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게 빛을 비추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지 팔일이 되었을 때 아기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에 따라 결례를 드리러 성전에 왔습니다. 그때 시므온이란 경건한 신자를 만나게 됩니다.

 

   (눅 2:34-35)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시므온은 아기 예수의 장래에 대해 아주 의미심장한 말로 예언합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이 예언대로 후에 예수님이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격렬한 논란의 표적이 되었던 것을 복음서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너무나 특이하신 분, 기이하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반면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신성 모독자요 귀신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하는 자라고 점심을 싸가지고 다니며 반대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란 가운데 결국 무죄함에도 예수님은 폭력적인 죽임을 당했어요.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왜 예수님을 그렇게 논란의 표적이 되도록 의도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것을 통해“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나게 하려 하심이라”고 시므온은 말합니다. 즉 십자가의 사건은 각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그 내면의 드리워진 어두움을 드러나게 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누가 하나님께 참으로 속한 자이며, 누가 겉으로는 경건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인지, 그 참 실상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는 표적이 됩니다. (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묻습니다. 힘없이 붙잡혀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느냐고. 2,000년에 죽임을 당한 그분의 죽음이 어떻게 오늘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그 로마 사형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얼토당토 되지 않는 말을 믿다니 당신 정신상태가 온전한가?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지금도 하나님을 인정하기 거부하는 사람들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드러내는 빛이 됩니다. 반면에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으로, 영생으로 인도하는 빛이 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하게 됩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흘리신 보혈의 피를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3) 성령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참 빛을 비추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위로자, 상담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그리고 오순절 후 성령이 내려오셔서 하시는 일 가운데 중요한 일 한 가지는 이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적 흑암 가운데 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하도록 사단이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래서 바리새인이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차라리 영적 소경이라고 겸손히 인정한다면 진리에 무지한 죄가 용서 받을 수 있겠지만 너희는 본다고 하니 그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빛으로 그 어둠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깨닫게 하십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여기서 책망하신다는 말은 나무라서 깨닫게 한다는 뜻입니다. 본래의 의미는 죄가 있다는 것을 확정시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책망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구원 받는 것도 먼저 우리가 죄인 됨을 깨달아져야 하기 때문이죠. 세상 사람들이 왜 구세주이신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보혈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세요. 그래서 성령님이 임하시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지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빛을 사람들에게 비취시는 것입니다.

 

3. 드러내는 자의 복됨

 

   이 빛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어두운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걸고 이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모습, 거룩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탐욕과 탐식, 음란과 광패, 비뚤어지고 왜곡된 사고방식으로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그것을 알까봐 겉으로 더 엄격하게 종교적 계율을 지키고자 힘썼어요. 그리고 자신들의 묹제점들을 다른 사람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때 그들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비취는 그 빛에 자신을 드러내고 고침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사람들은 빛으로 나와 자신을 드러내어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그 대신 제사를 드립니다. 즉 예배를 드립니다. 헌금을 드립니다. 봉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랫동안 출입해도 그 인격에 변화가 없어요. 옛 습관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자아가 병들어 있는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죠. 이 병든 자아가 고침을 받으려면 주님께 내놓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상한 심령"이란 바로 병든 자아를 뜻합니다. 자아가 바르게 치유되지 않으면 신앙도 역시 병든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탐욕과 탐식, 음란, 중독, 시기, 질투, 흩기는 눈, 거짓말과 험담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칠 때 주님은 병든 자아를 새로운 자아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의 자아가 고침을 받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갈 수 있습니다. 병든 자아로부터 비롯된 집착이나 이기심, 그리고 자기중심에서 맺어진 관계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무거운 인생의 짐에서 풀림을 얻습니다.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삶은 희망과 무한한 가능성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4.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을 비추고 계시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빛을 알아보고 그 빛 가운데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핏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육정으로나’ 남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사람의 뜻으로’우리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지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더 이상 어둠에 속하지 않습니다. 밝은 빛에 거하게 됩니다.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삶의 원리를 찾게 되며, 삶의 목표를 발견하게 되고, 삶의 길을 찾게 됩니다.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지, 왜 사는지, 사방천지가 캄캄했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에게 비췬 그 빛을 우리도 또한 세상에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4:14,1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번 성탄절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예수의 빛이 힘 있게 임하여 그 빛으로 어두운 시대를 밝힐 수 있길 기도합니다.